최루탄이 박힌 학생의 시신사진과 깡패에게 피습 당한 학생사진은 4.19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군인은 정권에 협조할 생각이 없었다. 이에 4월 25일 대학교수(27개 대학 258명)들이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후, 다음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대통령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사태의 책임을 지고 모두 물러나라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교수단 시위는 기존의 반정부 시위에서 대통령 하야 시위로 성격이 변화되었고, 통금시간대 이후 철야시위에도 군의 개입은 없었다. 4월 26일 새벽 통금이 해제되자, 군중이 운집하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다. 오전 9시경 이기붕의 자택이 피습되었고, 9시 30분경에는 파고다공원의 이승만 동상이 무너졌다. 오전 10시경 경무대 앞에만 10만명 가량의 시위대가 모였다. 미정부는 미대사관과 CIA을 통해 이승만에게 망명을 권했고, 이승만은 이를 수용했다. 결국 10시 20분경 라디오에서는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흘러 나왔다.
군중의 미움이 컸던, 이기붕
근데 당시 국민이 가장 싫어했던 정치인은 이승만이 아닌 이기붕이었다고 한다. 이승만이 하야하던 26일 저녁 이기붕 자택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물품들은 모조리 불태워졌다. 경교장(김구 집무실)이었던 이기붕 자택부지에는 현재 4.19 혁명기념도서관이 들어서게 된다
미국에서 유학(데이버 주립대) 중이던 이기붕은 현지에서 박마리아와 1931년 약혼했다가, 1934년 귀국한 후 결혼했다. 이들은 여유있는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 홀어머니 아래에서 가난하게 자란 박마리아는 교회가정부로 일하다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여전을 거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기붕도 홀어머니 아래에서 선교사의 도움으로 보성고를 졸업하고 일본·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부부는 어린 시절 겪은 가난을 증오했으며, 그래서인지 권력욕이 강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최남은 귀국한 이기붕을 국일관(종로)의 지배인으로 고용했으며, 국일관은 당시 최고의 요정이었다. 이기붕은 3년 간 국일관에 근무하면서 정치적 출세를 발판을 마련했다. 국일관 퇴사 후에는 광산사업을 하다가, 해방 직후 미군정청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낸 이승만의 신임을 바탕으로 비서직을 수행하다가 1949년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했으며, 한국전쟁 중에는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후반 이기붕 국회의장과 장면 총리는 반도호텔(소공동) 객실에서 집무실로 사용했다.
박마리아는 이승만 정권을 몰락시킨 악녀 이미지가 강한데, 이기붕을 2인자로 만든 배후자이기 때문이다. 박마리아는 귀국 후 YWCA와 이화여전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대한부인회를 정치도구화하면서 여성계의 1인자로 군림했다. 박마리아는 프란체스카(이승만 부인)의 유일한 말벗이었다. 이기붕은 슬하에 2남 1녀가 있었다. 1957년 이승만의 83세 생일을 맞이하여, 이기붕은 자신의 장남(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키기로 한다. 둘은 같은 전주이씨기도 했다. 이기붕은 이승만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고, 이기붕의 서대문 자택은 서대문 경무대로 불렸다.
권력에 중독된 자의 행태를 보면, 말이 문제인지 정신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박마리아에게 부정선거·폭력의 부당성은 관심 밖이었다. 박마리아는 3.15 마산의거를 종교교육을 받지 못해 발생한 사건으로 치부했고, 4.18 고대생 피습사건에 대해서는 진압을 제대로 못한 반공청년단을 비난하기도 했다. 4월 25일 시작된 교수단 시위 이후, 이기붕 일가는 포천 군부대로 피신했다. 4월 28일 새벽 이강석은 2자루의 권총으로 부모·남동생을 죽인 후 자살했다고한다. 하지만 이강석의 2군데 총상(복부·머리) 부위는 타살의혹을 일으켰는데, 치명부위 2군데를 동시에 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기붕 일가가 죽은 몇 시간 후, 미정부가 이기붕 일가의 망명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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