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5년(세종 7) 12월 10일 내은이(궁녀)가 임금이 쓰던 푸른 옥관자(망건에 다는 작은 옥고리)를 훔쳐 손생(환관)에게 건네면서, 서로 언약을 했다가 참수형에 처해졌다. 속대전에 따르면, 궁녀가 간통하면 두 남녀는 부대시(不待時, 사형집행시기인 가을철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참수했다. 별감은 궁녀와 함께 근무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정분(情分, 사귀어서 든 정)이 날 확률이 높았다. 특히 10대 별감·궁녀는 연모의 본능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1453년(단종 1) 4월 14일 중비(심부름 담당 궁녀)가 부귀(별감)를 연모했다. 이전 글 <평생 궁에서만 지낸, 궁녀>에서 궁녀와 궁녀의 하녀에 대해서 언급했었는데, 심부름 담당이라는 점에서 중비는 방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중비가 부귀에게 붓을 빌리려 했고, 부귀는 차후에 가져다 주겠다고 답했다. 중비는 붓을 핑계로 대궐에서 만남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고, 이후 어린 궁녀 3명(중비·자금·가지)과 어린 별감 3명(부귀·수부이·함로)가 만남을 가졌다. 오늘날 미팅 정도 되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대궐 내 만남이 적발되면서, 별감·궁녀들은 각각 관노(함경도 부령)와 관비(평안도 강계)로 쫒겨났다. 정을 통했다는 증거가 없어 극형은 면했지만, 외로운 청춘들이 만났다는 이유로 궐 밖으로 쫒겨났으니 안타까운 시대였다.
덕중은 수양대군의 아이를 낳은 여인으로, 세조가 즉위하면서 소용(정3품 후궁)까지 올랐다. 하지만 세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죽게 되고 세조의 애정마저 사그러지자, 송중(환관)에게 연정을 가지다가 적발되었다. 하지만 세조는 별다른 처벌은 하지 않았다. 이후 덕중은 장래가 촉망되는 귀성군(임영대군 아들)을 연모하게 되는데, 귀성군은 18살에 병조판서, 28살에 영의정에 올랐다. 덕중은 귀성군에게 연서를 2차례 보냈으나, 이를 받은 귀성군은 부친을 통해 세조에게 보고했다. 첫 편지를 보고 받은 세조는 덕중의 지위를 방자(심부름 궁녀)로 격하시켰지만, 두번째 편지를 보고 받은 후에는 교수형에 처했다. 덕중의 편지를 귀성군에게 전달한 내시 2명은 대궐 밖으로 끌어내어 때려 죽였다.
1667년(현종 8) 5월 20일 귀열(왕대비전 궁녀)은 형부와 간통하다가 임신한 상태에서 적발되었고, 출산까지 기다렸다가 참형에 처해졌다. 형조에서는 교수형을 청했으나, 임금이 직접 참형을 명령했다.
한성 유흥의 큰손, 별감
18세기 초반 별감의 행실은 깡패 수준이었다. 송만재의 한문시 관우희에서는 별감을 '붉은 옷에 초립을 쓴 장안의 왈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왈자(曰者)는 말·행동이 거친 화류계 인사를 일컫는다. 1709년(숙종 35)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을 다음과 같다.
별감 송정희가 예닐곱 명의 불량배들과 창녀의 집에 모여 거문고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소리를 지르는데, 술과 고기가 질펀하므로, 본부(사헌부)의 관리가 붙잡으려 하자 피하여 숨어버렸습니다. 비록 경미한 일이지만 기강의 문제이니 잡아들여 징계하시기 바랍니다.
19세기 도시의 발달과 함께 시장경제가 확산되면서, 자연스럽게 유흥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당시 별감은 궁중행사에 기생을 수습·안배하는 역할을 했고, 기방(妓房)의 실질적인 운영권을 장악했다고 한다. 화류계를 대표하던 별감의 외관을 더욱 화려해졌는데, 밀화호박을 사용한 동곳, 거북등껍질로 만든 관자 등의 사치품을 착용했다.
당시 화류계의 큰손은 별감·반인·검계였다고 한다. 19세기 풍물가사 한양가에서는 별감이 주최한 승전놀음을 한성 최고의 놀이로 표현했는데, 참고로 승전(承傳)은 왕명 전달을 의미했다. 경치 좋은 정자에 화려한 무대를 꾸며, 유명한 기생들이 소개와 함께 등장하면 놀이가 시작되었다. 악공들이 풍악을 울리고 소리꾼들이 가사·잡가·시조를 부르면서 흥을 키운후, 기생들의 북춤·검무가 대미를 장식했다.
악공집안에서 태어난 이원영은 거문고 신동으로 알려졌는데, 무엇보다 인물이 출중했다고 한다. 17세의 이원영은 장악원(궁중 음악·무용 관장) 별감이 되면서, 많은 기생들이 이원영을 흠모했다. 효명세자(순조 아들)의 총애까지 받은 이원영은 정2품(자헌대부)까지 승승장구했지만, 효명세자의 요절(21세)로 스폰서를 잃은 이원영은 궁궐을 떠나야 했다. 민간에서 거문고 교습소를 차렸지만, 기생에 빠져 모든 재물을 탕진했다. 돈 없이 늙어가는 이원영 곁을 지켜줄 기생은 없었으니, 결국 본처에게 돌아와 다음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내 늙은 뒤에야 조강지처와의 즐거움을 알았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어르신들이 하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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