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봄 가뭄에 시달리던 시향촌 농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흙 속에서 인체 형태의 토기조각을 발견했다. 토기조각은 기원전 2세기 멸망한 진나라의 병마용(兵馬俑, 병사와 말을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었고, 용(俑, 허수아비)은 인형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병용 수가 8천명이 넘는데, 병용의 얼굴 생김새, 표정이 각기 달랐다. 채색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졌지만, 복식·신발까지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BC 221년 진시황(秦始皇, 진나라의 첫 황제)은 500여년 동안의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키면서,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했다. 오늘날 중국의 영어명 차이나(China)는 진(秦)나라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진시황은 북방 유목민족(특히 흉노)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했으며, 중앙집권을 위해 표준화(문자·화폐·법 등)를 꾀했다. 병마용은 진시황릉의 일부로 알려졌고, 진시황릉은 높이 100m 가량의 토산이다. 황제즉위 직후부터 38년 간 조성되었으며, 70만 명 이상의 인부를 동원되었다고 한다.
죽지 않거나 죽어서도 권력욕, 진시황
진시황은 죽는 것이 두려워 했다는 점은 선약(仙藥, 불로초)에 대한 집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복(徐福, 서불)은 사기에 등장하는 진나라 방사로, 제나라 출신이다. 전국통일 후 진시황은 불로초 집착하기 시작했으며, 서복은 삼신산을 불로초 탐색장소로 상소했다. 중국 고대 신선사상에서 삼신산(三神山)은 동해(발해) 가운데 불로초가 있는 전설의 3개 섬으로, 오늘날 한반도의 섬을 일컫었다.
봉래산(蓬萊山) : 금강산
방장산(方丈山) : 지리산
영주산(瀛洲山) : 한라산
1582년 정철(당시 전라관찰사)가 광한루원(남원)을 확장하면서, 연못에 삼신산을 상징하는 3개의 인공섬을 조성했다. 현재 국가명승 제17호로, 조선 정원사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BC 219~210년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서복을 3차례 동아시아로 파견했다고 전해지는데, 규모만 총 1만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 실종된 것으로 전해진다.
1차 파견 : 산동 출발, 삼신산 탐색
2차 파견 : 교룡 제거 후, 귀환 없음
1차 귀환 후 서복은 교룡(蛟龍, 바다뱀)의 방해로 선약을 구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교룡을 없애기 위한 궁수 증파를 요구했다. 결국 궁수들이 큰 물고기 1마리를 죽인 후에서야, 서복은 2차 파견을 요청했다. 사실 서복은 1차 파견 과정에서 불로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했을지도 모른다. 이에 처형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 서복은 애초에 2차 파견에서 귀환할 생각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2차 파견에서 어린이 3천여명과 기술자를 대거 동반한 것으로 보아, 서복은 건국을 위해 진나라의 인적자원을 탈취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복이 황칠나무를 찾아 제주도를 방문했을 당시, 정방폭포에 서불과지(徐市過之, 서복이 이 곳을 지남)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서귀포(西歸浦, 서복이 서쪽으로 귀환한 포구)가 유래했다. 서복은 규슈에 정착하게 되는데, 실제 규슈(와카야마·쿠마모토)에는 서복묘·서복산이 있다. BC 210년 한여름 진시황은 전국 5차 순시 중에 사망했는데, 당시 불로초·풍수지리 점검 겸 암살 우려로 전국을 순시하고 있었다. 진시황은 49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수은을 불로약으로 알고 마셨다고도 한다.
불로초를 염원하던 진시황은 어쩔 수 없이 죽게 된다면, 죽어서도 권위·권력이 영원하길 원했다. 그래서 자신의 무덤에 호위부대·궁녀·건설인부까지 순장(생매장)했다고 한다. 사기에 묘사된 진시황릉의 내부는 다음과 같다.
천장 : 보석으로 만든 별자리
바닥 : 중국대륙을 본뜬 지형
주변 : 수은으로 만든 황하·장강(연 1만㎥)
실제 진지황릉 주변에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은 수치가 나왔으며, 도굴 방지를 위한 보안장치(자동쇠뇌 함정)가 갖춰져 있다는 말도 전해진다. 중국정부가 50년 가까이 진시황릉을 발굴하지 않고 있는 이유로는 기술적 부족 외에 도굴 가능성도 있다. 오래 전 항우가 진시황릉을 파헤치고 불태웠다는 설이 있으며, 황릉 내에 100톤 가량의 수은이 있어서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또한 100m가 넘는 토산을 무작정 팠다가는 붕괴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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