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수나라에 처음으로 시행된 과거제도는 고려시대 들어 한반도에 도입되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과거에 매달린 이유로는 관료로서의 출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양반이라는 기득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3대에 걸쳐 과거(소과 포함) 합격경력이 없으면 양반자격을 박탈하였는데, 이를 삼대무현관(三代無顯官)이라고 한다.
양반가 자제들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과거를 위한 교육을 받았는데, 서당에서 시작하여 중등교육기관인 지방 향교(서울은 사부학당)에 들어가 소과를 준비하였다. 이전 글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에서는 정도전 집터 사당자리에 중학을 설립되었음을 언급했었고, 사부학당의 당시 위치를 표시했었다. 성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소과합격증이 필요했다. 소과는 진사시(시문)·생원시(사서경)로 구분하여 초시·복시를 거쳐 각각 100명씩 총 200명을 선발했다.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 입학자격을 갖추었고, 문과 대과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졌다. 대과는 다음과 같이 3차례의 시험을 치렀다.
초시 : 240명 선발
복시 : 33명 선발
전시 : 성격 결정(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과거합격자 33명, 숭불사상
과거제도가 처음 실시된 고려 광종대에는 급제자의 과등(科等)이 없었는데, 경종대 갑과·을과로 나누기 시작했다. 고려 성종대 병과·동진사가 생기면서 4개 등급으로 구분되다가, 현종대 갑과가 없어지면서 33명을 3등급(을과 3인, 병과 7인, 동진사 23인)으로 구분했다. 참고로 과거의 최종급제자를 33명으로 정한 이유는 고려의 숭불사상에서 유래되었는데, 불교의 우주론에서 수미산 정상에는 위치한 도리천(삼십삼천)에 33개의 성이 있다고 한다.
조선 초기 고려의 과등을 그대로 사용했다. 1436년(세종 18) 동진사를 정과로 변경했다가, 1466년(세조 12)부터 정과를 없애고 갑과를 추가했다. 과거성적에 따라 다음과 같이 임관품계가 갈렸다.
장원 : 종6품
갑과 : 정7품
을과 : 정8품
병과 : 정9품
같은 갑과라도 1등과 나머지 2명 간에 품계차를 두었고, 장원·병과 간에는 5계급이나 차이가 났다. 조정에서 1단계 승진에 소요되는 기간이 약 3년이었다고 하니, 여간 큰 격차가 아니었다. 이러한 연유로 병과로 급제한 관리는 고위관직에 오르기 위해 과거에 재도전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요즘같이 민주화된 사회에서도 일부 권력층의 입시비리는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현대인의 시각에서 바라봤을 때 조선의 과거시험은 불공정의 극치를 보여주는 면들도 있었다.
일단 조선 중기까지 응시자의 친척·친구들이 함께 시험장에 들어가 공동으로 답안을 작성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종의 지식품앗이로 한 사람씩 합격을 밀어주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대리시험 전문가들이 등장하면서 함께 시험장에 들어갔다고 한다. 소과에서 장원이 되기 위해서는 가문의 후광이 필요했는데, 장원을 선정할 때는 >집안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장원의 시험관은 물론 급제자들도 수긍할 만한 집안 사람이어야 했던 것이다. 심지어 생삼진육(생원시 3등, 진사시 6등)은 불운이 따른다고 하여, 고의로 서자·중인에게 그 등수를 부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목숨 걸고 편을 가른, 전근대
이전 글 <계유정난의 시작, 서대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단종복위를 도모한 사육신 등은 잔인하게 처형되었으며, 일가와 여식들도 죽거나 노비로 전락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전 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배신>에서 전근대사회는 확고한 계급구조와 가족·공동체에 대한 구속적인 의무를 특징으로 하기에, 배신행위가 사회적 규범·가치를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추방이나 심지어 죽음과 같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언급했었다. 예나 지금이나 반역세력이쿠데타에성공하면 구 정권에 충성하는 세력들은 숙청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현대인의 가치관에서 바라보면 비인간적인 사회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당시의 가치관으로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볼 가능성이 높다. 지금이야 역모·연좌제라는 개념이 희미해지고 죄를 지을 경우에도 본인만이 사법체계상의 형법을 감당하면 되지만, 과거에는 죄인은 물론 씨(자손)를 남기지 않았다. 암튼 전근대사회의 처신은 하이리스크-하이리턴이었고, 자신은 물론 가족·가문·동지의 과거와 현재를 송두리채 날리는 것을 담보로 배팅해야 한 것이다.
수양은 왕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는 신숙주의 머리를 활용였지만, 왕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는 한명회가 큰 역할을 하였다. 권람의 소개로 신숙주를 알게 된 한명회는 친구·사돈의 관계로 발전했는데, 한명회가 신숙주보다 2살 위였다. 두 절친은 수양이라는 하나의 태양을 만나면서 권세·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데, 그에 걸맞게 한강변에 풍류를 즐기는 공간을 소유하게 된다.
한명회의 압구정, 신숙주의 담담정
한명회는 남은 여생을 유유자적하기 위해 한강가에 정자를 지었는데, 자신의 호를 따서 압구정(狎鷗亭)이라고 불렀다. 압(狎,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내는)과 구(鷗, 갈매기)는 갈매기와 벗하며 욕심없이 자연과 어울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연산군이 한명회를 부관참시한 후, 압구정은 조선 말에 이르러 박영효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박영효도 갑신정변을 도모한 역모 혐의로 처형됨과 동시에 압구정은 철거되었다.
안평대군은 삼절로 불렸는데, 삼절(三絶)은 시·서·화 3가지를 겸비한 문인화가를 말한다. 스스로 궁궐에서 멀리 한 안평대군은 인왕산 기슭에 비화당·무계정사를 지었고, 마포에는 담담정을 두었다. 유토피아(이상향)을 꿈 꾼 안평의 은거의지는 몽유도원도(안견)에 잘 나타나 있는데, 안평이 그림을 설명한 도원기를 완성했다. 몽유도원도에는 박팽년이 서문을 넣고, 21명 문인에게서 찬문을 받기도 했다. 안평의 꿈 속에서 무릉도원을 함께 한 3명은 박팽년·신숙주·최항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신숙주·최항이 안평의 반대편에 섰다.
안평은 급변하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이상(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어린 조카의 왕위를 지키려는 이상주의자적 면모를 보였지만, 이런 선택이 자신의 최후에 어떻게 작용할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안평을 제거한 수양은 동생의 흔적을 모조리 없앴다고 한다. 인왕산 무계정사와 마포 담담정(淡淡亭)은 안평대군의 안가 역할을 하던 곳으로, 라이벌 수양의 감시를 항상 받아 왔다. 담담정은 서적 1만권과 귀한 서화와 골동품 200여점을 보관하던 곳으로, 안평은 이 곳에 선비들을 불러다가 시문을 짓곤 했다고 한다. 이전 글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나서, 요정>에서는 일본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쿠데타를 계획하는 비밀회의 장소로 게이샤 찻집을 주로 이용했다고 언급했었다.
계유정난을 일으키기 전에, 수양은 안평이 마포 담당정에서 지지자를 모아놓고 정치세력화를 도모했다는 점을 비난했다. 안평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담담정을 활용했다고 알려졌지만, 문예가로서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풍류를 즐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조는 담담정을 신숙주에게 하사하였고, 그 자리에 지어진 신숙주의 별장을 자주 행차하면서 여유를 즐기곤 했다고 한다.

신숙주 사후 담담정은 터만 남았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세관감시서와 마포장(馬浦莊,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별장)이 지어졌고, 해방 이후 귀국한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약 2달 가량을 이 곳 마포장에서 머물었다. 이승만은 마포장에서 암살의 위기를 모면했는데, 당시 암살단에는 남로당 소속 경찰관 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화장도 신숙주의 손자의 집터라고 하니, 이쯤되면 고금을 막론하고 고위급 정치인들 간의 인연은 한정된 자원에 복잡하게 얽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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