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순(貞純)왕후 호를 받은 왕비는 다음 2명이다.
정순왕후 송씨 : 단종 정비
정순왕후 김씨 : 영조 계비
이전 글 <특권층 의리의 시대, 세도>에서 정순왕후(경주김씨)가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펼쳤고, 본가를 권력의 중심에 놓았다고 언급했었다. 4년 간의 수렴청정 이후, 15세의 순조가 친정하면서 안동김씨가 정치권을 장악했다. 14세의 단종은 1살 연상의 송씨와 혼인했다. 송씨는 왕비가 된지 3년 만에 노비로 전락한 후, 82세의 나이로 승하하기까지 64년 동안 단종을 그리워하는 삶을 살았다.
정순왕후 송씨의 동네, 숭인동
정순왕후 송씨의 흔적은 주로 숭인동에 남아 있다. 1457년(세조 3) 폐비는 영월로 유배 가던 단종을 마지막으로 배웅한 공간이 영도교(永渡橋, 영영 이별한 다리)로, 처음에는 이별교로 불리다가 성종대 보수와 함께 공식명칭이 되었다. 현재의 영도교는 청계천 복원 후 신축된 다리지만, 원래 위치(숭인동·황학동 경계)를 재현했다. 영도교 북측의 사정골(동묘 남쪽마을)에는 채소를 팔던 여인시장이 있었는데, 현재의 동묘시장 내부이다. 출궁된 정순왕후가 정업원(현 청룡사 부지)에 머물렸는데, 당시 부녀자들이 여인들만 입장 가능한 시장을 만들어 정순왕후를 도왔다고 한다.
조선 초기의 숭인문(崇仁門, 현 동대문)은 세조대 흥인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조선시대 두모방이었던 현재의 황학동 일대는 청계천 저지대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조선 후기부터 난전이 형성되었고, 일제강점기에도 빈민촌·시장으로 발전했다. 숭인제(崇仁瀨)는 숭인문 밖 물가에 있던 여울(제)로, 정순왕후는 단종이 유배 가던 배를 숭인제까지 따라가 배웅했다. 현재의 황학동 일대는 1936년 신당정이었고, 1943년 황학정이라는 행정명이 처음으로 붙여졌다. 인근 논밭에 황학이 날아와서 새끼를 치고 살았다는데서 유래되었는데, 황학(黃鶴)은 전통적으로 흰색 학(장수·고귀함 상징)을 가리켰다. 나무둥지에 사는 백로류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아서, 두루미(학)와는 구분되기도 한다.
부인을 절에 남긴, 단종
정순왕후가 머물던 정업원(淨業院, 순수한 업을 닦는 곳)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비구니 사찰로, 조선 개국 초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전했다. 창덕궁 후원 뒷편에 재건된 정원은 조선왕실 여성들의 불교출가처로 이용되었지만, 여러 차례 폐지·재설립되었다. 1448년(세종 30) 숭유억불 정책과 유생들의 반대로 최초로 폐지되었다가, 1457년(세조 3) 불교친화적이었던 세조가 왕실비빈·과부·장애인을 구휼한다는 명목으로 복립했다. 이전 글 <불심과 흥청이 거쳐간 공간, 탑골공원>에서 1464년(세조 10) 세조는 유생·양반의 반발을 무릎쓰고, 흥복사지를 확장하여 원각사를 세웠다고 언급했었다. 1459년 조정은 정업원 사찰건물의 중창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후 연산군대 폐지되었는데, 연산군은 원각사에 연방원(구 장악원)을 두기도 했었다. 1550년(명종 5) 유생의 반대 속에서 인수궁으로 위장하여 재설립했으나, 1612년(선조 40) 유생의 극심한 반대로 폐지된다.
숭인근린공원에는 동망정·동망봉·동망각·숭인재가 있는데, 동망(東望)은 정순왕후가 남편의 동쪽 유배지(영월)을 바라보던 공간(정자·봉우리·각)이다. 단종이 죽은 후,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동망봉에 올라 통곡을 했다고 한다. 영조는 바위에 친히 동망봉(東望峰)을 새겼으나, 일제강점기 채석장이 들어서면서 바위가 깨졌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낙산의 동쪽 줄기(숭인동·창신동 일대)에는 대규모 채석장이 들어 섰고, 이 곳에서 채굴한 돌로 경성역·시청·총독부 건물을 건축했다. 해방 이후 채석장 절벽 아래에 마을을 이뤘는데, 지금도 동묘역 북쪽을 오르다 보면 부자연스럽게 깍인 절벽들을 볼 수 있다.
매년 가을 보문동에서는 정순왕후를 위한 슬픈 제사를 온린다고 한다. 청룡사 우아루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하룻밤을 보낸 곳이며, 비각에는 영조의 친필현판이 걸려 있다. 비우당 뒤에는 자주동샘이 새겨진 바위와 정순왕후가 옷감을 물들이던 장소가 함께 있다. 정순왕후는 염색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마을여인들이 정순왕후를 많이 도왔다고 한다.
원수에 대한 복수, 장수
세조는 정순왕후에게 집·시녀·식량을 보냈으나, 정순왕후는 아버지·남편을 죽인 이의 도움을 거절했다. 송현수(정순왕후 송씨 부친)은 수양대군과 죽마고우였고, 세종대 문과에 급제한 후에 수양과의 친분으로 왕실로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사육신 사건 이후에도 송현수는 세조의 보호 끝에 목숨을 부지했으나, 금성대군·순흥부사가 연루된 2차 복위 음모에 연루된 혐의를 받게 된다. 1457년(세조 3) 송현수는 의금부 추국 끝에 교살형(絞殺刑, 교수형)이 집행되었으며, 이 소식을 접한 단종이 영월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정순왕후는 사릉(남양주)에 묻혔고, 단종은 장릉(영월)에 묻혀 있다. 사릉 장릉의 소나무들은 서로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전해진다. 가족이 없던 정순왕후가 군부인의 신분으로 죽은 후, 경혜공주(단종의 누나)의 시댁(해주정씨)에서 묘를 조성했다. 정순왕후의 유언은 단종 곁에 묻히는 것이었지만, 신분 차이로 행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1698년(숙종) 단종이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도 종묘로 모셔졌지만, 이장은 이루지지 않았다. 1999년 정순왕후 사저의 소나무 한 그루를 장릉에 옮겨 싶었고, 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부른다. 정순왕후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복수가 원수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이었다면, 이를 이룬 한 맺힌 여인의 삶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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