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지귀연 판사가 윤석열 내란재판에서 찰스 1세의 사례를 인용하며,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헌데 이재명 정부와 여당이 판결문을 읽어보고, 마냥 좋아해야 하는 상황인지는 모르겠다. 지귀연이 정치적 재판에서 세계사(고대로마·근세영국)의 사례를 끌어 온 것은 단지 지식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아닌 이상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다. 특히 찰스 1세의 케이스는 윤석열 정부와 거대야당의 대치구조와 완벽한 평행이론에 서 있다. 윤석열 내란재판 결과는 가까운 미래에 역사적 재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기에, 판사의 의도가 궁금하다.
왕권과 대립했던, 의회
1603년 엘리자베스 1세 서거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왕(제임스 6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제임스 1세가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왕권은 신으로부터 부여)을 신봉했고, 이는 의회(귀족·젠트리 중심)의 불만을 샀다. 1625년 즉위한 찰스 1세(제임스 1세 아들)도 왕권신수설을 두고 의회와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당시 의회는 왕의 필요에 따라 소집·해산되는 제한적인 권한만 가지고 있었지만, 의회는 세금승인권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시킨 후, 프랑스 공주(Henrietta Maria, 앙리에타 마리)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영국사회(청교도·의회파)의 불만을 더욱 가중시켰는데, 가톨릭에 대한 영국의 반감이 컸기 때문이다. 찰스 1세는 스페인 전쟁(1625~1630)에 필요한 자금을 위해 의회를 소집했지만, 의회는 탄핵(버킹엄 공작)을 요구하며 세금승인을 거부했다. 이에 의회 동의 없이 불법과세를 시도하다가, 1627년 5기사 사건으로 저항이 격화되었다. 1628년 찰스 1세는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했고, 의회가 주장한 권리청원에 마지못해 승인했다. 1629년 찰스 1세는 의회를 해산시킨 후, 1640년까지 11년 간의 전제정치를 이어갔다. 이 시기 찰스 1세의 최우선 과제는 제한적인 재정으로 외국과의 전쟁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었으며, 스페인·프랑스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1637년 찰스 1세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교회를 통합하기 위해 성공회식 기도서를 장로교(스코틀랜드)에 강제도입하려 했다가,
1639년 스코틀랜드와의 주교전쟁(Bishops' Wars)이 발발했다. 영국 입장에서는 스코틀랜드의 반란이었다. 1940년 4월 찰스 1세는 전비마련을 위해 11년 만에 단기의회(Short Parliament)를 소집했으나, 왕에 대한 불만만 표출하는 의회는 3주 만에 해산했다. 이후 10월 스코틀랜드가 주교전쟁에서 승리하면서, 11월 찰스 1세는 배상금 마련을 위해 장기의회(Long Parliament)를 재소집했다. 장기의회에서도 왕의 실정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왕의 측근을 처형하고, 의회에 유리한 법안(정기소집, 의회해산권 제한 등)을 통과시켰다.
외회를 장악한 전쟁권력, 크롬웰
1642년 찰스 1세는 400명의 부하와 함께 의회에 진입한 후, 자신을 비판하던 의원 5명을 체포하려다 실패했다. 이후 의회는 군대를 독자적으로 도입했고, 찰스 1세는 런던을 탈출하여 의회와의 내전을 준비했다. 내전 초반 찰스 1세의 군대가 우위를 점했지만, 이후 의회파는 신형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신형군(New Model Army)은 올리버 크롬웰(지방지주 출신의 무명의원)이 신앙·능력 중심으로 창설한 새로운 군대였다. 1645년 네이즈비 전투에서 패배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피신했지만, 결국 스코틀랜드인은 찰스 1세를 잉글랜드 의회에 넘겼다. 이후 찰스 2세는 2차 내전을 일으켰지만, 의회에 의해 쉽게 제압되었다.
이후 의회 내부는 온건파(협상파)와 급진파(처형파)로 나뉘어 충돌했다. 내전 중 전쟁권력은 신형군의 등장으로 의회-군대-크롬웰 순으로 이동하면서, 1648년 토마스 프라이드는 크롬웰의 지시에 따라 온건파를 숙청했다. 이후 프라이드가 장기의회 폐회와 동시에 럼프의회(Rump Parliament)를 소집했고, 럼프의회는 급진파 의원과 군대가 중심이었다. 사실상 럼프의회는 크롬웰의 군사쿠데타 성공을 의미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럼프(Rump, 포유류의 숨겨진 부위)는 잔여부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회기의 잔여기간 동안 개회되었다.
최고법원(High Court of Justice)는 럼프의회가 설립한 혁명법원으로, 크롬웰이 지명한 법관들로 구성되었다. 상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크롬웰은 찰스 1세를 국가반역죄 혐의로 혁명법원에 세웠다. 그 결과 찰스 1세는 처형되었다. 이후 크롬웰은 잉글랜드 공화국(Commonwealth)을 선포한 후, 왕정·상원을 폐지했다. 크롬웰은 호국경(Lord Protector)으로서 독재권력을 행사하다가, 1658년 사망했다. 인간은 다 똑같다. 왕은 신이 되고 싶어하고, 신하는 왕이 되고 싶기 마련이다. 크롬웰의 절대권력은 아들에게 이어지지 못한 채, 1660년 찰스 2세(찰스 1세의 아들)이 왕위에 복귀하게 된다.
정치인이 쉽게 빠지는, 오만
왕정복고 이후, 찰스 2세는 아버지의 사형판결에 서명했던 이들을 체포했다. 당시 찰스 1세의 판결에는 흠결이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왕의 재가가 있어야만 판결이 유효했던 것이다. 찰스 1세의 승인이 없었던 찰스 1세의 사형판결은 무효였던 것이다. 체포된 대부분의 이들은 재판을 통해 참수형에 처해졌고, 크롬웰도 부관참시를 당했다. 공개적으로 교수대에 매달린 후 참수된 것인데, 불과 11년 만에 혁명세력이 붕괴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오만을 버려야 한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초기 이해찬은 최소 20년 이상의 장기집권 야심을 드러내었는데, 이는 박근혜 탄핵 이후 민주당 지지율 60%대에 취해서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적폐청산(사실상 정치인 싸움)을 완수하기 위해 장기집권을 하고 싶었겠지만, 그 희망은 5년 만에 꺾이고 말았다. 국민에게는 부동산 정책이 적폐타령 보다 훨씬 중요한 이슈이다. 적폐에 동조하지 않는 의회권력을 등에 업고 집권했다 한들, 그 얼마나 가겠는가. 왕정을 뒤업은 크롬웰 권력 조차도 불과 11년 만에 지긋지긋해지지 않았나. 권력의 유한함을 기억해야 하며, 정적에게 휘두른 칼은 머지않아 나의 목으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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