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군(경남)에 위치한 소바위 주변에서 3명의 큰 부자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다음 3명의 재벌총수가 나오면서 현실화되었다. 모두 지수공립보통학교(훗날 지수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조홍제(효성, 1906년) : 함안군(군북면 동촌리)
구인회(LG, 1907년) : 진주군(지수면 승산리)
이병철(삼성, 1910년) : 의령군(정곡면 중교리)
이병철의 친한 형, 조홍제
1906년 함안 부호의 아들로 태어난 조홍제는 지수공립보통학교 1회 졸업생이다. 1926년 20살이 되던 조홍제는 6.10 만세운동 주도한 일로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제적되었는데, 옥고를 치른 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조홍제는 유년시절부터 이병철 형제와 교류하던 사이였는데, 조홍제가 일본으로 건너 간 시점에 이병철도 일본유학을 가게 된다. 이전 글 <승부사 기질의 금수저, 이병철>에서 이병철은 일본유학에 대한 부모의 반대로 옆 동네에 살던 4살 연상의 조홍제에게 유학경비를 빌렸다고 언급했었다.
일본에서 경제학(호세이대)을 전공한 조홍제는 선진공장을 자주 방문하면서 사업의 꿈을 키웠고, 1935년 졸업하게 된다. 귀국 후 조홍제는 9년 동안 군부금융조합 조합장을 역임하며 경영노하우를 익혔다. 군부금융조합은 1907년 시작된 지방금융조합으로, 농민·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저리의 자금을 빌려주어 농업·지역경제 발전을 돕는 것이었다. 해방 직후 서울로 상경한 조홍제는 이병철을 이웃으로 우연히 만났고, 이후 둘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된다. 1948년 11월 조홍제·이병철은 영보빌딩(종로2가, YMCA빌딩 인근) 2층에서 삼성물산공사를 공동으로 설립했는데, 당시 임원진은 다음과 같았다.
이병철 : 사장
조홍제 : 전무
김생기 : 상무(훗날 영진약품 창업)
당시의 무역은 주로 화교상인(홍콩)이 부산·인천 등지에서 건오징어·한천·면실박(목화에서 기름을 짜낸 찌꺼기)를 교환(수출)해가는 형태였는데, 수입품목은 설탕·의약품·면사·재봉틀·철판·비료 등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무역상이 수출품을 싣고 해외무역상을 직접 찾게 되었다. 1949년 11월 조홍제는 부산에서 건오징어를 선적한 후 8일 만에 홍콩에 도착했는데, 침사추이(구룡반도)에 위치한 찬넬양행을 찾았다. 문제는 현지의 건오징어 시세가 너무 낮다는 것이었는데, 조홍제는 건오징어를 담보로 이창복(교포무역상)과 찬넬양행으로부터 각각 면사 50곤(梱)를 외상매입했다. 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수출입 외상거래였다.
초기 성장의 발판, 무역업
당시 한국에서의 면사가격은 홍콩의 2배 이상이었고, 홍콩에 들여 온 설탕에 대한 수요도 많았다. 1947년 이양구는 동양식량공사를 설립한 후, 제과원료(수입설탕·밀가루)를 판매했다. 동양식량공사는 삼성물산공사로부터 수입설탕을 대량공급 받으면서, 이양구는 설탕왕이라 불렸다. 이양구는 함주(함경남도) 출신으로, 1931년 영신학교를 졸업한 후 함흥물산에 입사했다. 1938년 대양공사(식품도매업)을 설립하면서 독립했는데, 함경도 일대의 설탕·밀가루를 도매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1941년 일제의 전시기업청산령으로 강제해산되었는데, 이후 1942년 함흥식량영단에서 근무했다. 1947년 월남한 이양구는 동양식량공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1951년 이양구는 삼양물산공사를 설립하여 설탕을 직접 수입했으며, 1954년 이병철과 협력하여 설립한 한국정당판매를 통해 제일제당과 독점판매계약을 성사시켰다. 제일제당(이병철)이 설탕을 제조하면, 한국정당판매(이양구)가 유통을 맡았던 것이다.
한국정당판매는 1960년대 초반까지 제일제당 설탕을 독점적으로 유통했으며, 1964년 한국양회공판으로 변경되었다. 이양구는 한국정당판매를 통해 동양그룹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병철은 제당사업을 안착시킬 수 있었다. 양회(洋灰, 서양의 석회)는 시멘트를 의미하는데, 당시 석회는 한회라 불렀다. 1964년 다음의 삼분폭리사건에서 양회 논란도 있었다.
제일제당 : 설탕
대한제분 : 밀가루
동양시멘트·대한양회 : 양회
삼성그룹의 발판, 삼성물산
출자지분에 관해서는 삼성·효성이 각각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삼성을 이병철 출자비율을 75%라고 주장하는 반면, 효성은 조홍제가 70%를 출자했다고 말해 왔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 사업경험이 풍부했던 이병철을 대표로 내세운 것이다. 화상들은 기업명의 끝에 공사를 붙이곤 했는데, 삼성물산도 훗날 주거래선이 될 화교상인(홍콩)을 염두하여 공사라 이름 지었다.
이전 글 <승부사 기질의 금수저, 이병철>에서 1938년 이병철은 대구 수동에 삼성상회를 설립한 후, 의식주 중에서 먹을 것에 집중했다고 언급했었다. 이전 글 <지분이 분산된, GS>에서는 삼성상회 설립 당시 이병철·조홍제·허만정이 공동출자(자본금 3만원)했으며, 허정구는 제일제당·삼성물산을 경영했다고 언급했다. 삼성물산공사는 삼성상회의 서울사무소 역할을 했으며, 1951년 한국전쟁 피난지(부산)에서 통합법인화(삼성물산주식회사)했다.
삼성물산은 전쟁 후 고철(탄피·무기)을 일본 철강공장에 수출하면서 크게 성장했는데, 당시 일본은 전후복구를 위해 철강수요가 강했다. 삼성물산은 자본이 17배 가량 성장(3억원→51)하면서, 설탕·비료 수입자금을 마련했다. 이병철의 기획력과 조홍제의 치밀한 업무처리능력이 거둔 성과라고 평가되고 있다. 조홍제는 무역실무 경험은 없었지만, 외국어(영어·독일어)로 된 무역지식을 독학으로 익혔다. 이후 1953년 제일제당을 설립하여 제조업으로 진출하게 되며, 1954년 삼성물산은 종합상사로 지정된다. 결국 삼성물산의 급성장이 재벌화의 발판이 된 것이다. 삼성물산 본점은 반도호텔(소공동, 1953년)을 거쳐 삼성빌딩(태평로, 1976년)으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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