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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기아나의 개명, 가이아나

by Spacewizard 2026.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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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가이아나에서 대규모 유전(7억 배럴 추정)이 발견되었고, 2020년대 가이아나로 진출한 미국 오일메이저가 수십억 배럴의 유전을 확인했다. 2023년부터 베네수엘라는 가이아나와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 가이아나는 남아메리카 북쪽(베네수엘라 동쪽)에 위치한 남미 유일의 영어권 국가로, 한반도의 크기에 80만명 가량의 인구가 있다. 1498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 후, 스페인-네덜란드-프랑스가 순차적으로 신대륙을 점령했다. 1814년 영국이 런던조약을 통해 네덜란드로부터 3개령(에스퀴보·데메라라·버비스)를 인수한 후, 영국령 기아나(British Guiana)로 불렀다. 기아나는 노예경제체제(설탕농장 중심)를 유지되다가, 1834년 노예제 폐지 이후에는 타국(특히 인도·중국)의 노동자들이 유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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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잔재를 제거하려는 개명, 가이아나

 

1953년 총선에서 인민진보당(PPP)이 다수당이 되어, 제한적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체디 자간(Cheddi Jagan, 인도계)과 포브스 버넘(Forbes Burnham)은 각각 정부수반과 교육부장관을 맡았다. 하지만 1953년 영국은 다시 통치를 하게 되는데, PPP정부가 공산주의적이라는 이유로 헌법을 정지시켰기 때문이다. 1955년 PPP가 분파(자간파·버넘파)되었고, 버넘은 인민민족회의(PNC)를 창당하면서 다음과 같은 정당의 특색을 갖췄다.

 

PPP(인민진보당) : 인도계

PNC(인민민족회의) : 흑인계

 

1961년 새로운 헌법을 통해 내부자치(외교·국방을 제외한 모든 내정자율권)가 시작되고, PNC가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버넘이 수상을 맡게 된다. 1966년 영연방 내 독립한후 후, 버넘 정부는 국가명을 기아나(Guiana)에서 가이아나(Guyana, 물이 많은 땅)로 공식적으로 변경했다. 이는 식민지 잔재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1970년 가이아나는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는데, 버넘 정부는 대통령제를 도입하면서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후 버넘은 아프리카식 사회주의 건설에 주력했고, 사회주의 정책(광산·농장의 국유화, 협동조합경제 등)을 도입했고, 권위주의 통치(언론통제·야당탄압·부정선거 등)를 시도했다. 또한 1980년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권한을 강화했는데, 1985년 20년 넘게 집권한 버넘이 사망한 후, 1992년 데스먼드 호이트가 취임하면서 민주화를 통한 경제성장이 이뤄졌다. 남미 북동부 대서양 연안은 여전히 더 기아나(The Guianas)로 불리고 있으며, 이 지역 내 각국의 식민지 명칭은 다음과 같이 변화되었다.

 

가이아나(Guyana, 1966년 독립) : 구 영국령 기아나(British Guiana)

수리남(Suriname, 1975년 독립) : 구 네덜란드령 기아나(Dutch Guiana)

프랑스령 기아나(French Guiana, 프랑스령 유지)

 

단위무게당 가장 비싼 우표, 마젠타

 

영국령 기아나 1센트 마젠타(British Guiana 1c magenta)전 세계에 단 한 장만 남은 우표로서, 영국왕실 우표 컬렉션에 포함되지 않는 유일한 유표이다. 1856년 당시 영국령 기아나(현 가이아나)에서 정규우표가 폭풍으로 인해 제때 도착하지 않아, 현지 신문인쇄소에서 임시로 소량 제작한 비상발행 우표이다. 당시 가이아나의 표준 우편요금은 4센트였기에, 4센트 마젠타 우표는 몇 장 남아 있었다. 하지만 1센트 마젠타 우표는 유일했다. 마젠타(magenta, 자홍색) 종이에 검은 잉크로 인쇄하였고, 중앙에 범선(삼·사닥 장선)과 인쇄신문사 직원의 서명(E. D. Wright), 그리고 다음의 식민지 모토(식민지·본국의 상호호혜주의)가 표기되어 있다.

 

Damus Petimus Que Vicissim

우리는 주고, 그 대가를 기대한다

1센트 마젠타 우표

임시우표는 잠시 사용된 후, 사용이 중단되었다. 1872년경 조지타운(구 데메라라)에 살던 12세 버넌 본은 다락방에서 오래된 편지묶음을 발견한 후, 그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이쁜 마젠타 우표를 급하게 떼다가 한 귀퉁이를 찢게 되었다. 본은 나머지 3개의 귀퉁이도 잘라서 팔각형 우표를 만든 후, 맥키넌(우표상)에게 50센트에 팔았다. 맥키넌은 마젠타 우표를 보고도 놀란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맥키넌은 5년 동안 마젠타 우표를 보관하다가, 1877년 영국인(토마스 리드페드)에게 자신의 모든 컬렉션을 600달러에 팔았다.

 

리드페드는 오스트리아인(페라리)에게 마젠타 우표를 750달러에 팔았는데, 페라리 백작은 유년기부터 우표수집에 심취했던 인물이었다. 막대한 부를 가진 페라리는 1860년대 중반부터 희귀우표를 매집하기 시작하여, 19세기 말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우표컬렉터가 되었다. 마젠타 우표의 현재가치는 페라리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1917년 페라리는 다음의 유언을 남긴 채 사망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오스트리아에 기증하고,

우표는 베를린 박물관에 기증한다

 

하지만 1차 대전에서 패한 오스트리아는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프랑스는 페라리의 전 재산을 몰수했다. 1922년 하인드가 경매를 통해 마젠타 우표를 낙찰받은 후, 한 차례 위조논란(가격단위·인쇄상태·잉크성분·우체국소인 등)이 일어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검증되면서 논란은 종식되었다. 1934년 하인드로부터 마젠타 우표를 상속받은 부인은 프레드릭 스몰에게 4.5만 달러에 판매했다. 1940년 스몰이 뉴욕경매장에서 익명의 수집가(Harmer)에게 5.25만 달러에 넘긴 이후, 1센트 마젠타 우표는 30년 동안 자취를 감췄다.

 

1970년 뉴욕경매장에서 와일 브라더스(Weill Brothers)가 1센트 마젠타 우표를 28만 달러에 매입한 후, 1980년 존 듀폰가 93.5만 달러에 낙찰받았다. 존 듀폰(듀폰가 상속인)은 레슬링을 후원하던 중에 코치를 총으로 살해한 인물로, 복역 중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1999년 1센트 마젠타 우표에 대한 논란이 또 일었는데, 1센트 마젠타 우표가 1장 더 존재한다는 루머였다. 하지만 위조우표는 4센트 마젠타 우표를 변형한 것이라는 검증결과가 밝혀지면서, 논란은 종식되었다. 1970년대에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지만, 당시 위조우표의 상태가 너무 조악해서 논란이 오래가지 못했다.

 

2014년 존 듀폰의 유산관리인이 뉴욕경매장에 내놓은 1세트 마젠타 우표를 스튜어트 와이즈먼(Stuart Weitzman, 여성구두 디자이너)가 984만 달러에 낙찰받았는데, 이는 당시 세계 최고 우표 낙찰가였다.

 

2021년 스탠리 기븐스(영국 우표회사)가 마젠타 우표를 낙찰받았는데, COVID-19 팬데믹의 영향으로 직전 낙찰가보다 낮은 830만 달러 수준이었다. 현재는 런던의 특수 무산소 전시 케이스에 상설전시 중이며, 지분소유 형태의 투자상품으로도 판매 중이라고 한다. 현재 1센트 마젠타 우표의 뒷면에는 그간 소유자들의 시그니처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스튜어트 와이즈만은 이름의 약자 뿐만 아니라 여성구두 그림까지 그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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