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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금융투자

[기업] 메리츠의 뿌리, 한진

by Spacewizard 2025.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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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현재 메리츠그룹은 금융혁신그룹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2005년 한진그룹 계열분리 당시에는 막내아들이 비주력을 맡았다는 평가가 많았다. 2005년 한진그룹 내 다음 금융계열사들이 메리츠 브랜드로 분리·독립하면서 금융전문 브랜드 체계를 확립했지만, 메리츠금융그룹의 자산은 3.3조원에 불과했다.

 

동양화재 : 훗날 메리츠화재

한진투자증권 : 훗날 메리츠증권

한불종합금융 : 훗날 메리츠종합금융

 

이전 글 <역사를 써나가는, MG손보>에서는 동양화재(구 조선화재)가 삼성그룹을 거쳐서 1967년 한진그룹으로 인수되었다고 언급했었다. 메리츠증권은 최희문을 전문경영인으로 영입한 2009년까지 중소형 증권사에 불과했다. 2010년 메리츠종금증권(메리츠증권·메리츠종금 합병)이 출범했고, 2011년 메리츠화재를 인적분할하면서 지주사 체제가 되었다. 2011년 메리츠종금증권이 미분양담보대출확약(미담확약)를 출시했는데, 이는 부동산PF시장에서 획기적인 상품이었다.

 

이전 글 <응용되는 위험보험, CDS>에서 미담확약은 PF에서 준공 후 미분양이 발생함으로써 PF대주가 가지는 원금상환리스크를 헤지하기 위해, 원금상환을 보장하는 상품이라고 언급했었다. PF대출을 일으키기 위한 신용보강의 하나로, 미분양분을 담보로 한 대출을 보증해주는 상품이다.

 

증권사는 미담확약금액의 100%를 영업용순자본비율(NCR)에서 차감해야 했던 반면, 종금사는 차감비율이 8%에 불과했다. 미담확약의 경쟁력에서 증권사는 종금사를 따라올 수 없는 환경이었고, 메리츠종금증권은 경쟁자 없는 미담확약시장에서 급성장하게 된다. 2011년 유일한 경쟁자였던 동양종금증권이 종합금융업 라이선스를 반납했다. 2020년 메리츠종금증권도 종합금융업 라이선스를 반납하면서, 메리츠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는 합병으로 인한 종합금융업 라이선스는 10년 동안 유효했기 때문이었고, 메리츠는 10년(2010~2020년) 동안의 합법적 독점시장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했다. 그 결과 2022년 증권업 당기순이익 1위(8,281억원)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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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1대로 시작한, 한진

 

1937년 조중훈은 해원양성소(진해) 기관과를 졸업한 뒤, 후지무라조선소(고베)에서 현장엔지니어로 근무했다. 1942년 귀국한 조중훈은 효제동(경성)에 이연공업사(자동차정비업)를 창업했는데, 목탄을 연료로 쓰던 트럭의 엔진을 수리했다. 하지만 1943년 기업정비령(조선총독부)으로 인해 마루베니(丸紅, 일본 군수업체)에 의해 강제편입되면서 사업이 중단되었다. 강제징용된 조중훈은 용산공작창에서 근무했으며, 1945년 11월 이연공업사를 정리했다.

 

회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받은 보상금과 저축으로 트럭 1대를 구입하여, 인천에 한진상사(화물운송업)를 창업했다. 트럭 1대로 시작한 서울-인천 간 화물운송업한진(韓進, 한민족의 전진)의 첫발이었다. 창업 5년 만에 30대의 트럭과 10척의 화물선을 보유한 운송전문회사로 성장했으며, 한국전쟁 중에도 장비 관리와 서비스에 집중하면서 주한미군의 군수물자 수송권을 독점적으로 확보했다.

 

운송로 성장한, 한진

 

1957년 한진상사가 법인으로 전환한 후, 1958년 상장하게 된다. 1960년 대한항공 설립으로 항공사업에 진출했고, 베트남전에 미군을 수송하면서 해외시장으로 진출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다음의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는데, 주로 운송(해운·항공)과 그에 필수적인 보험업이었다.

 

해운업 : 대진해운, 한진해운

보험업 : 동양화재

항공업 : 대한항공공사(인수)


1969년 조중훈은 대한항공공사(국영)를 인수했다. 지금의 대한항공을 생각하면 큰 이권으로 생각되겠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무거운 결단이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의 부채는 27억원 가량으로, 국내 최대의 부실 국영기업이었다. 박정희의 강력한 의지로, 정부(비서실장·중앙정보부장·재정장관 등)이 직접 중재를 나섰지만, 조중훈은 여러 차례 인수거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군사독재시기 일개 기업인이 국가의 지시를 거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결국 조중훈은 다음의 신념으로 결단하게 된다.

 

만인에게 유익한 사업이라면 만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키워가는 것이 기업가의 책임

 

당시 조중훈은 대한항공공사 부채를 전부 부담하는 조건으로 인수계약을 체결했고, 인수대금은 14.53억원이었다. 다만 인수대금 지급은 장기간(7~10년)에 걸쳐 분할납부하는 구조였다.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조중훈은 국내선에 여객기를 도입했고, 경쟁이 치열했던 국제선(일본·홍콩·동남아 등)을 확장했다. 1971년 태평양을 횡단하는 미국노선을 개설하면서, 글로벌 항공사로 도약하게 된다. 

 

1989년 한진그룹이 대한조선공사(법정관리)를 인수한 후, 1990년 한진중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청년시절 조중훈은 조선기술 전문가였고, 해운업의 성장은 조선·선박수리 수요가 수반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937년 동양척식과 미쓰비시중공업은 조선중공업을 설립했고, 1938년 국내 최초로 철강화물선(390톤급)을 건조했다. 조선중공업은 해방 전까지 군함·수송선을 건조하면서 성장했다. 1949년 조선중공업은 대한조선공사로 사명을 변경한 후 국영기업으로 운영되다가, 1957년 재무구조 악화로 민영화되었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만든, 메리츠

2002년 조중훈이 별세한 이후, 한진그룹은 다음 4명의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조양호 : 대한항공·한진그룹(항공업)
조남호 : 한진중공업그룹(조선업)
조수호 : 한진해운(해운업)
조정호 : 동양화재·한진투자증권·한불종합금융(금융업)

 

첫째 자식으로 딸(조현숙)이 있으며, 그룹계열 분리가 있은지 1년 만인 2006년 조수호(삼남)가 향년 52세로 사망했다. 유산분배는 명확한 유언장 없이, 임종 전에 직원들이 받아 적은 유언장에 따라 이뤄지면서 갈등의 여지를 남겼다. 장남(조양호)에게 많은 재산이 귀속되는 과정에서 차남·막내가 소송(주식명의개서 및 손해배상청구, 유언장 조작 등)에 관한 소송을 제기했다. 특히 차남·막내는 생전에 약속받았던 정석기업 지분을 상속받지 못한 점을 문제 삼았는데, 이후 조양호는 정석기업 지분을 차남·막내에게 돌려주게 된다. 참고로 정석기업은 그룹 내 부동산을 관리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계열사이다.

 

유교문화권에서는 본명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 본명 외에 부르는 별명이 있었다. 이를 아호라고 하는데, 본명과 달리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었다. 정석(靜石, 고요함과 바위)은 조중훈의 아호로, 조명희(조중훈 선친)이 지었다. 1978년 설립된 정석기업은 국내 최초의 부동산관리·임대 전문회사로, 서울 한진빌딩(명동), 인천 정석빌딩 등의 그룹계열 빌딩을 중심으로 부동산을 보유·관리하면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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