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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지치지 않는 에너지, 이용만

by Spacewizard 2025.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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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익장(老益壯, 늙을수록 더욱 왕성함)은 늙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기운이 강해져서 젊은이 못지 않다는 의미인데, 최근 유튜브에서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채널이 많아지고 있다. 2025년 기준으로 이용만(1933년생, 92세), 선우용녀(1945년생, 79세)가 채널을 오픈하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홀로 월남하여 자수성가한, 이용만

 

1962년 관료생활을 시작한 이용만은 박정희 정부 내내 재무부에서 요직을 거쳤다. 1966년 청와대 비서실에서 재직하면서, 대통령 주재 회의안건, 참석자 선정, 회의 후 속기록 작성을 수행했다. 1971년부터 이재국장(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을 3년 6개월 동안 역임했는데, 이는 정부 수립 이후 최장수 국장 기록이다. 1970년대 초반 이재국(理財局)은 금융 관련 중요부서를 모두 소관하고 있기에, 재무부 내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들이 발탁되는 부서였다. 역대 이재국장 총 33명 중에서 장관 10명, 차관 5명이 배출되었다. 사실 이재국은 18세기 전후 조선의 재정사무·물품출납을 수행하던 기관으로, 왜란·호란 이후 혼란기(삼정문란·민란 등) 속에서 그 역할이 중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1980년 5월 28일 이용만은 신군부의 숙정대상에 오르면서,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에서 해고되었다. 1985년 이용만은 신한은행 은행장(2대)으로 취임하면서 은행경영을 하게 되었고, 1988년 재무부 장관(사공일)의 추천으로 외환은행장에 임명되었다. 참고로 신한은행 초대 은행장은 이희건으로, 재일교포 대표로서 신한은행 설립을 주도했었다. 1982년 설립된 신한은행은 국내 최초의 순수 민간자본 시중은행으로, 금융자율화 정책(1981년)에 따라 재일동포들이 본국의 열악한 금융환경을 개선하겠다는 금융보국(金融報國, 금융의 역할로써 나라에 진 빚을 갚음)의 정신에 바탕하고 있다. 신한(新韓, 새로운 나라)한국 금융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후 이용만은 1990년 은행감독원장을 거쳐서 1991년 노태우 정부의 재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2009년부터 이용만은 무궁화신탁 회장(겸 대표이사)를 지냈는데, 부인과 함께 지분 22.6%를 보유한 최대주주였다. 2016년 오창석이 무궁화신탁을 인수한 이후에는 명예회장으로 지냈으며, 2013년 우리금융지주 이사회 사외이사 의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이전 글 <아직까지 계속되는 시행착오, 부동산신탁>에서 2016년 무궁화신탁 최대주주가 이용만에서 오창석(전 법무법인 광장 파트너변호사)으로 변경된 이후, 무궁화신탁이 공격적인 계열 확대를 펼쳤다고 언급했었다.

 

평강군(강원도) 출신인 이용만은 평강고급중학교에서 최우등생의 성적을 거뒀지만, 평양에서 개최된 전국최우수생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는 부농(지주)의 아들이라는 이유였는데, 17세의 이용만은 이러한 차별·제약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가족과 떨어져 홀홀단신으로 월남하였고, 한국전쟁에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한국전쟁 당시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 어깨에 박힌 총탄파편을 평생 지닌 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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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의 경제통, 남덕우

 

많은 재무부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이용만도 존경하는 인물로 남덕우를 꼽는다. 남덕우는 국내 최장수 재무부 장관과 경제기획원 장관(부총리)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1970년대 한국경제의 실질적인 설계자로 평가받고 있다.

 

1969년(~1974년) : 재무부 장관(상업은행 민영화, 8·3 긴급금융조치 등)

1974년(~1978년) : 경제기획원 장관(중화학공업 육성, 중동 진출 등 개발경제 전략)

 

1994년 2개의 부처(재무부·경제기획원)이 재정경제원으로 통합되었고, 오늘날 기획재정부에 이르렀다. 과거 재무부(1948년)돈의 흐름을 관리하는 보수·실무적 부서로, 세금징수, 국가재정, 금융(은행·증권·외환) 정책을 담당했다. 금융권과 민간경제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만큼, 강력한 모피아(Mofia, 경제관료집단)가 파생되었다. 경제기획원(1961년)은 재무부와는 달리 미래지향적·개혁적 부서로, 중장기 경제개발 계획의 수립과 예산 편성, 투자 조정 등의 국가경제 컨트롤타워(기획)을 담당했다. 재정경제원은 재정경제부(1998년)을 거쳐, 기획재정부(2008년)로 이름을 바꿨다.

 

짧지만 인상 깊었던 은행, 동화

 

1993년 동화은행 비자금(뇌물수수) 사건이 있었는데, 한국 고위 공직자들의 금융비리·정경유착을 대표적으로 보여줬다. 여러 명의 정·관계 인사가 안영모(동화은행 행장)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용만·김종인은 각각 5억원과 2.1억원을 뇌물로 받은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로 수사를 받았다고 한다. 김종인은 징역 2년 6개월(집행유예 4년), 추징금 2.1억원을 선고 받으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1989년 동화(同和)은행실향민 사회가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87년 이북5도 은행설립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출자자격은 실향민과 그 자손·친인척에게 부여되었다. 주주기반이 워낙 강하다 보니, 설립 당시 1,800여 명의 직원과 118개의 점포를 둘 정도의 규모를 갖추었다. 외환위기 당시 부실화된 동화은행은 1998년 신한은행에 P&A(자산·부채 인수) 방식으로 인수·통합되었다. 이전 글 <살아남기 위한 필요조건, 건전성>에서 1998년 6월 금융당국은 12개 부실은행 중에서 5개 은행(동화은행 포함)에게 대해서는 강제 피인수를 통보했다고 언급했었다. 이렇게 동화은행은 설립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외국계 자본의 타겟, 노스게이트

 

동화은행 본점은 적선동(종로구) 현대상선빌딩(현 노스게이트)에 위치했었다. 1989년 현대상선은 본사사옥을 준공하였으나, 2002년 라살인베스트먼트(LIM, LaSalle Investment Management)가 엘에이알에프노스게이트(LARF Northgate)유동화전문유한회사을 통해 750억원 가량에 매입했다. 이후 건물명은 노스게이트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당시 LIM은 국내 부동산 투자를 위해 룩셈부르크 법인(투자지주)를 설립한 뒤, 룩셈부르크 법인이 다시 벨기에 법인을 설립하여 투자를 집행했다. 이는 조세회피를 목적으로 한 해외SPC 설립으로 알려져 있다.

동화은행 본사 전경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후 2004년 LIM은 유동화회사 주식 전부를 PCA(Prudential Assurance Company Limited, 영국계 푸르덴셜그룹)에게 433억원 가량에 매각했는데, 부동산을 직접적으로 거래하는 방식이 아닌 소유법인의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거래되었다. 법인의 부채와 기타비용을 감안하면 1,100억원대 규모의 거래로 전해진다. 2006년 외국계(룩셈부르크) 펀드는 노스게이트제1차유동화전문회사을 통해 노스게이트를 1,250억원 가량에 매입한 후, 2013년 국내 사모부동산펀드(이지스자산운용)에게 1,700억원 가량에 매각했다. 외국계 펀드는 자본차익 외에도 사채이자수익(연 7~12%)을 얻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외국계 펀드가 실제로 매각했다기 보다는, SPC 청산시점에 맞춰서 투자구조를 변경(재투자)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정당정치의 맥을 짚을 줄 아는, 김종인

 

오늘날 김종인은 대통령을 만들어 내는 킹메이커로 유명하지만, 1970년대부터 활약이 대단했다.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김종인은 1973년 서강대학교 교수(경제학과)로 임용된 이후, 1974년부터 박정희 정부의 경제정책에 조세전문가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서도 활동하면서 전두환 정부에서 정계에 진출했고, 다음과 같이 4번의 국회의원(비례대표)를 지냈다.

1981년(11대 국회의원, 전두환) : 민주정의당 소속
1985년(12대 국회의원, 전두환) : 민주정의당 소속
1992년(14대 국회의원, 노태우) : 민자자유당 소속
2004년(17대 국회의원, 노무현) : 새천년민주당 소속

 

1989년 노태우 정부 시절, 김종인은 보건사회부 장관을 취임했다. 이후 1990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지적하면서 비업무용 토지의 과세를 추진했다. 다만 금융실명제 도입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에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를 지내면서, 스스로를 비례대표 2번에 배치하면서 생애 5번째 비례대표직을 노리기도 했다.

 

비례대표 소속 정당에서도 알 수 있지만, 정치색을 가리지 않고 정당들의 혁신전략을 꾀하는 전략가이다. 2012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와 2016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를 이끌면서 총선에서 승리했을 만큼 정당정치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줬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선 과정에서는 야당(국민의힘)의 총괄선대위원장으로 영입되어 초기전략을 수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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