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는 천국이라는 판타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는데, 천국지원센터장(천호진 분)은 다음과 같이 지옥을 정의한다.
"되돌릴 수 없는 과오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용서라는 문조차 없는 나만의 감옥"
드라마에서는 지옥을 삶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죄책감·불안이 극대화되는 심리적 공간으로 묘사된다. 마지막 포도알을 받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설정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이는 작가가 죽음을 좀 더 친숙히 받아들 수 있도록 한 장치가 아닌가 싶다. 지옥에서 받는 처벌은 흔히 알고 있는 잔인한 형벌이 아닌, 자신의 잘못·아픔을 반복해서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이래나 저래나 찬란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내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 진다.
1941년생의 김혜자는 드라마에서 80세의 이해숙을 연기하면서 많은 감정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한다. 주인공의 나이가 실제 자신의 나이보다 어리며, 1950년대의 천국에서 20대의 엄마를 상봉하는 장면을 연기한다.
노년에 죽음을 다루는, 김혜자
김혜자는 3녀 중 막내로, 언니들과는 15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난다. 김용택(김혜자 부)는 광복 후 미군정 초대 재무부장(훗날 재무부장관)을 3년 가량 재직한 엘리트로, 일제강점기 2명의 딸을 낳은 후 22세의 나이에 유학(미국·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었다. 1940년 귀국한 김용탁은 1941년 김혜자를 낳게 된다. 당시 40세 가까운 나이에 김혜자를 낳은 어머니는 몸이 편찮은 날이 많아, 주로 큰 언니가 김혜자를 돌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큰 언니와도 워낙 나이 차이가 크다 보니,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외롭게 보냈다고 한다.
김혜자는 극 중 젊은 엄마를 만나는 장면에서 자신의 젊은 엄마를 떠 올렸을 수도 있는데, 어린 시절 결핍된 모성애가 인생의 희노애락을 다 겪은 노년기에 와서는 강한 그리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인간의 모성애(母性愛)는 아이를 향한 본능적 사랑이자 애착(attachment, 유대감)인데, 엄마·아이 간의 안정적인 애착은 아이의 심리적 안정과 사회성 발달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소녀 김혜자는 알 수 없는 결핍을 느끼면서, 뚜렷한 목표의식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어릴 적 경험했던 연극무대에서 적성과 찬사가 느꼈겠지만, 상류층 가문과 천시받던 배우라는 직업 사이에서 고민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김혜자의 집은 대지가 900평에 달할 정도의 대저택이었으며, 종종 사교모임, 부부동반 댄스파티, 영화 촬영지로도 사용되었다. 김혜자는 경기여중·경기여고를 거쳐서, 1961년 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에 진학했다. 김혜자가 거쳐 온 학적은 당시 최고의 신부감(흔히 사모님 코스)로 인식되었다.
덕수궁 내로 들어 왔던, 경기여고
이전 글 <여러모로 권력을 노렸던 공간, 헌법재판소 터>에서 1910~1945년 경기여자고등학교가 현 헌법재판소 부지에 위치했었다고 언급했다. 당시 경기여고 기숙사는 백송료(白松寮)로 불렸는데, 앞마당에 백송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백송은 박규수 중사랑 뜰에 위치했으며, 박규수의 집터 위에 백송료가 건립된 것이다. 寮(료, 동관)은 원래 작은 건물이나 절에서 생활하는 공간을 의미하는데, 일본에서는 기숙사를 뜻하기도 했다. 동관(同官)은 같은 부처에서 일하고 직급이 같은 관료를 의미하며, 쉽게 동기라고 볼 수 있다.
1908년 4월 순종의 칙령에 따라 관립한성고등여학교가 설립되었는데, 공조뒷골(현 세종문화회관 서쪽)에서 개교했다. 1910년 재동(현 헌법재판소 부지)에 목조 2층 교사를 신축·이전하였고, 1911년 11월 조선교육령에 따라 관립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성여보고)로 학교명을 변경했다. 1910년대 경성여보고는 전국의 수재와 명문가 자녀들이 입학하던 명문학교로, 조선총독부가 직할하던 유일한 여자고등보통학교였다. 당시 경성의 사립여학교(이화·배화·정신 등)는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설립·운영했었다.
1913년 경운동(운현궁 서쪽, 현 서울노인복지센터 자리)으로 이전했다가, 1922년 다시 신축 재동교사로 이전하면서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했다. 1945년 10월 정동 일본인 여학교 건물(흥덕전·흥복전 터, 덕수궁 선원전 내)로 교사를 이전했다. 원래 남산동(현 남산초등학교 부지)에 일본인 대상의 경성공립고등여학교가 위치했었는데, 1922년 흥복전·흥덕전 터로 이전하면서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로 학교명이 변경되었다. 1951년 9월 교육법 개정으로 경기여자중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1988년 현재의 개포동(강남구)로 이전했다.
경기여고가 있었던 자리, 왕실 제례공간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앞서, 거처로 삼을 경운궁(현 덕수궁)을 보수해야 했다. 참고로 1907년(순종 1)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전하면서 경운공의 궁호가 덕수궁으로 변경되었는데, 덕수(德壽, 덕이 높고 장수함)는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먼저 선원전(현 세종대로변)을 세웠는데, 선왕의 어진을 모시면서 제례의식이 행해지던 공간이었다. 선원(璿源, 옥의 뿌리)에서 옥(구슬)은 왕실을 의미했다. 이전 글 <공주댁 근처의 공간 변천, 소공동 롯데>에서는 1900년 전후 고종이 경운궁 앞으로 태평로는 개설했고, 1912년 태평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덕수궁의 상당부분이 편입되면서 현재의 서울시청 앞의 넓은 공간을 확보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1900년 10월 발생한 선원전의 화재로 모든 전각과 어진이 소실되면서, 1901년 선원전은 수어청 자리(당시 미국공사관 북쪽)로 이전되었다. 어진모사를 위해 각 지방에 있던 어진을 덕수궁으로 가져왔다. 흥덕전(興德殿, 선원전 우측)은 지방에서 올라온 어진을 모시면서, 어진을 모사했던 전각으로 사용되었다. 흥복전(興福殿, 흥덕전 우측)은 왕실 국장 뒤에 3년 간 신위를 모시던 전각이다.
일본이 궁궐 내 신성구역이었던 선원전을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총독부는 선원전을 훼철(毁撤, 헐어서 치워버림)하여 조선저축은행·경성일보에 매각했고, 그 자리에는 불교포교소와 학교가 들어서면서 공간적 의미를 격하시켰다. 가장 먼저 훼철된 흥덕전 권역은 창덕궁 행각공사 자재로 전용되었는데, 흥덕전 앞의 회화나무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100년이 지난 2014년 선원전의 복원을 위해 덕수궁 선원전 복원정비 기본계획이 수립했는데, 그에 앞서 2011년 정부는 미국과 토지교환을 통해 선원전·흥덕전·흥복전 권역을 확보했었다. 해방 이후 66년 동안 미국대사관이 소유해 왔었다. 2018년 고종의 길이 개방었는데,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피신했던 경로이다. 2022년 11월 문화재청(궁능유적본부)에서 흥덕전 권역에 대한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38년 선원전과 주요 전각·부속건물을 복원할 계획이다.
고통의 굴레, 인생
당시 엘리트 교육코스를 밟은 김혜자는 대학교 2학년이던 1962년 KBS 공채 1기에 합격하였고, 아버지의 지지 하에 연기자의 길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의 실력에 만족하지 못했고, 이화여대의 금혼규정을 어기면서 22살의 나이에 결혼을 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꽃길로 비춰졌겠지만, 내면을 들어야 보면 외롭고 험난한 인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고뇌를 연기를 통해 극복·승화시키면서, 위대한 인생을 걸어왔다. 단지 국민 어머니로만 알고 있었던 김혜자는 시대의 편견을 깨트리면서 살아 온 작은 거인이라고 생각된다.
빈부귀천과 무관하게 모든 인간에게 살아가는 것은 고통이다. 남들이 보기에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인생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혹자가 아무런 고민거리도 없어서 너무 평온하다고 느낀다면, 그것 또한 인생을 허비하는 것일지 모른다. 주택담보대출 없이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으면, 미래의 재무불확실성을 확실히 없앨 수는 있다. 하지만 도전할 수 있는 많은 투자기회를 상실하게 되면서, 인생에서 취할 수 있는 적당한 성취감·긴장감을 놓치게 된다. 인생에서 힘든 시간은 결국은 지나가게 되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는 그저 스쳐 지나간 추억에 불과할 것이다.
선우용녀는 남편의 사정으로 결혼 당일 보증서류에 사인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일로 남편이 미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갚을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게 된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상민도 과도한 부채로 인한 중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일과 주변의 도움을 경험하면서 삶의 가치를 높여 왔다고 생각한다. 이상민이 가수·프로듀서로서의 삶을 무난했다면, 지금의 궁상 맞은 이미지의 전성기를 맞이했을 가능성은 낮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는데, 기본적으로 우주(자연)이 지배하는 인간세상은 각양각색이다. 그렇더라도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은 현생이고, 언젠가는 사그러질 운명이라면 뭐라도 해보자. 다만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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