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중년배우로 최정우와 김해곤이 있는데, 처음에는 큰 인상을 받지 못했으나 뭔지 모를 깊은 여운을 주는 배우이다. 2025년 5월 최정우의 갑작스런 죽음(향년 68세)은 개인적으로 충격적이고 안타까웠는데, 얼마 전까지도 왕성한 연기활동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편안함을 연기하는, 목소리
1975년 연극무대에 데뷔한 최정우는 1990년대 연극계에서 왕성한 활동과 수상을 했었다. 2006년 SBS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최정우의 연기가 눈에 들어 왔는데, 자신을 원망하는 아들 민형중(이진욱 분)과 자신에 대한 복수의 도구가 될지도 모를 유은호(손혜진 분)를 대하는 부분에서 왠지 모를 슬픈 따뜻함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남성의 인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가 목소리라고 생각되는데, 최정우는 독보적인 발성을 가진 배우였다고 생각된다.
가끔 감독이 배우에게 연기를 조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때마다 감독의 연기실력은 어느 정도일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만족할 만한 연출력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배우의 연기를 이해할 필요가 있고, 감독 스스로가 연기경험이 있다면 아무래도 연출에 도움이 될 것이다. 김해곤은 2001년 영화 파이란의 시나리오 각본작업을 했고, 2006년에는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김해곤을 좋아하게 된 작품은 영화 달콤한 인생으로, 엉뚱하게 죽음을 맞이한 태웅(킬러 겸 무기밀매업자)를 연기하면서도 악의보다는 편안한 위트감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걸걸한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편안함을 느꼈었다.
너무나 소중한, 현생인연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감성·재치의 요소를 골고루 갖춰 16부작을 보는 내내 흥미를 잃을 겨를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작가의 인연론·윤회론이었는데, 자칫 터부시 될 수 있는 부분을 로멘스·모성애로 승화시켜서 감동으로 다가 왔다.
깐느극장 사장(김해곤 분)은 연인의 연에 대해 양금명(아이유 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못 봐. 다음 생에 보는거야. 다음 생에
억겁의 인연이 쌓여야 이생에서 한 번 본다는데, 이게 스칠 때 놓쳤으면 쫑입니다. 쫑
겁(劫, 억겁·영겁)은 아주 오랜 시간을 의미하는 불교용어로, 1,000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로 큰 바위에 구멍을 내거나, 100년에 한 번씩 내려오는 선녀의 치맛자락에 바위가 닳아 사라지는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지구의 나이 정도는 가볍게 초월하는 우주적 개념이라 생각된다. 마지막화에서 오애순(문소리 분)은 잠자리에 누운 채로 양관식(박해준 분)에게 말했다.
애순 : 다음에도 만날 수 있을까?
관식 : 왜? 안 만나고 싶어서?
애순 : 그런 복은 내리 안와. 어떻게 나만 꽃동산에 살어
제주여인 오애순은 우주의 원리를 다 꿰뚫는 듯, 다음 생에서의 인연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윤회의 굴레에서 같은 인연이 연달아 이어질 수는 있는 걸일까. 윤회에 관한 경우의 수는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무한하기에, 인연은 그저 우주(흔히 신이라고 표현)가 비결정론적으로 세팅한 값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내가 있는 이유, 카르마
불교·힌두교 등의 핵심개념 중에는 카르마가 있다. 카르마(Karma, 업)는 모든 업(행동, 생각·말·행위)에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 온다는 것으로, 현생의 모든 일들은 전생의 업에서 비롯된다는 인과관계의 법칙이다. 업의 인과성이 생을 넘어서 이어진다고 보는데, 전생에서 해결하지 못한 과제·인연은 현생의 과제·인연으로 이전다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영적 성숙을 업장의 소멸로 보고 있다. 사주명리에서도 이러한 점을 관찰할 수 있다. 운시(運始, 첫 대운의 지지)에 해당하는 육친이 전생의 업으로 읽히게 되는데, 이는 현생을 살아가는 내내 고민거리와 연관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6년, 수험생활로 인해 놓친 드라마가 많았었다. 그 중 여름에 방영했던 SBS 드라마 8월의 신부가 너무 보고 싶었었는데, 결국 1999년 입대하기 직전에 케이블TV로 봤던 기억이 난다. 당시 중성적인 매력으로 인기를 끌었던 김지호가 주연을 맡기도 했지만, 불교적 세계관(환생·전생·업·인연)이라는 소재가 신선했었다. 주인공 남녀가 환생하여 사랑에 빠지고, 여전히 생존해 있는 주변인들에 의해 전생의 기억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환생은 믿지만, 현생에서 전생의 흔적이 이어질 확률은 매우 낮다고 믿는 편이다.
개인적으로도 연인과의 만남을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부터 든다. 만약 약속이 있어 단체미팅에 불참했다면. 야근이 없어 제 때 미팅에 나갔다면. 같은 동네에 살지 않아서 같은 택시로 귀가하지 않았다면. 여차저차 연락처를 구해서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면. 찰나의 연속이었지만, 억겁의 인연을 놓치지 않았다는 마음에 현생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평소에 스스로와 문답함으로써, 자신의 카르마를 읽어 내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자기성찰과 타인과의 관계를 되돌아 보게 함으로써, 찰나의 현생에서 방향성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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