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디 좁은 한반도에서는 과거부터 지역감정은 있어 왔다. 오늘날에는 경상도·전라도 간의 동서대립이 진행 중이지만, 해방 이전에는 오랫동안 서북지방(패서)에 대한 남북대립이 있었다. 조선시대 패서(浿西, 패강의 서쪽)는 예성강 이북에서부터 황해도·평안도·함경도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패(浿, 패강)은 오늘날의 대동강 내지 예성강으로 추정된다. 과거 서북민들은 문화·전통적으로 자부심이 강했는데, 고구려·고려의 도읍이 위치했었기 때문이다.
지역감정의 표면화, 홍경래의 난
여말선초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패서의 여진족들이 많이 유입된 이후, 남부지역 사람들에게 서북민은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척박한 패서를 개척하기 위해 사민정책을 펼쳤지만, 중종 이후 패서는 유배지로 남았다. 개마고원 자락에 위치한 삼수·갑산은 조선시대 최악의 유배지로 유명했다. 산세가 험준한 패서는 호랑이의 출몰이 잦았고, 중국사신단의 착취도 심했다.
패서에는 원래 사족(士族, 사대부)가 적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도 사대부가 늘지 않았다. 소외받았던 만큼 성리학이 늦게 전해지면서, 기득권(양반) 세력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서북민 인구는 전체 인구의 30% 수준이었는데, 과거 합격자 비중은 23% 가량으로 상대적으로 적었다. 서북민은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승진의 한계가 있었고, 한성양반들은 서북민과의 혼인을 꺼렸다. 18세기 들어서는 당상관 후보 명부에서 서북지방 출신을 찾기가 어려웠으며, 무관직도 대부분 하위급에 머물렀다.
패서은 사대부 비중이 적은 지역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향리(아전·이방 등)의 권한이 컸다. 패서는 사신접대·군비충당 등의 사유로 세금을 걷어 자체적으로 소진하는 잉류지역으로, 세금징수의 역할을 향리가 담당했다. 수령과 결탁한 향리는 서북민들은 가혹하게 수탈했고, 결국 이반(離叛, 인심이 떠나 배반함)은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근대화에 바탕한 보수화, 패서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이후, 서북지역의 약점(정치적 소외)이 강점(근대화 선도)으로 전환되었다. 무역·상업에 종사한 서북민이 급성장을 이룬 것인데, 국경에 인접한 지리적 이점이 교역에 유리하기도 했다. 또한 타 지역에 비해 양반비중이 적은 것도 활발한 상업 분위기에 기여했다. 기득세력(중앙정부와 성리학적 질서)에 반감이 높았던 지역이었던 만큼, 새로운 문물·정신이 흡수되기 수월했다. 이에 선교사들은 서북지역에 기독교라는 신종교를 집중적으로 전파했으며, 1930년대까지 전국의 기독교 신자들 중 절반 가량을 평안도 사람들이 차지했다.
조선 후기 평안도는 자본의 축적을 통해 기득권 지역으로 변모했으며, 일제강점기 들어 점차 보수화되었다. 일제강점기 평안도민들은 타 지역보다 높은 단합심을 보였는데, 이는 과거와 다른 역차별을 가져왔다. 안창호(서북파)도 수도권·충청도 출신의 기호파에 대한 반감이 컸다고 한다. 1930년대 일제공업화 정책의 수혜를 받았으며, 만주침략의 성공으로 평안도 일대의 경기가 호황을 맞이 했다. 이 때 평안도 자본가들은 정치권과의 유착을 강화했는데, 만주로의 사업확장계획과 함께 자연스럽게 조선총독부과 가까워졌던 것이다.
세상은 역시 사이클이다. 소외받던 패서가 중앙정치권의 관심을 한껏 받더니, 해방 이후 북한이 들어서면서 또 다시 시련을 겪게 된다. 한반도 자본주의의 중심지가 한 순간 공산주의의 영역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함경도민이 한국전쟁 중에 주로 월남을 했다면, 평안도민은 해방 직후부터 일찌기 월남했다. 이렇게 4~5년 먼저 월남했던 평안도 출신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유독 심했기에, 남한 내 좌익세력 척결에 적극적이었다. 평안도 출신이 결성한 대표적인 반공단체가 서북청년단이다. 이전 글 <소외받다가 초토화된, 4.3>에서는 4.3사건 당시 조병옥이 투입한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제주 곳곳에서 즉결처분을 행했다고 언급했었다.
혼란기를 파고드는, 예언서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사이비 종교집단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주로 구전된 주술서를 바탕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하게 된다. 외세의 침입과 정변들로 민심·정세가 어지러워지자,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는 등장한 3대 예언서는 다음과 같다.
정감록(鄭鑑錄)
격암유록(格菴遺錄)
송하비결(松下秘訣)
정감록(鄭鑑錄)은 실존 여부를 알 수 없는 이심(李沁)과 정감(鄭鑑) 간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국가운명과 생민존망(生民存亡, 생민의 이해와 사직의 존망)에 대한 판단을 담고 있다. 정감록은 수십여 편의 비결류의 집성으로, 단일저자에 의한 작품은 아니다. 참고로 비결(祕訣)은 미래의 길흉화복을 그 내용을 알 수 없도록 적어 놓은 글이나 책을 의미한다. 풍수사상·도참신앙이 합쳐진 정감록은 다음 3개의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삼절운수설
계룡산천도설
정성진인출현설
왕실의 심기를 건드린, 정감록
삼절운수설(三絶運數說)은 이씨왕조가 3번 단절될 운수를 맞는다는 말세예언으로, 그 위기에 대한 대처방안을 파자(破字)풀이 은유법으로 제시했다. 여기서 3번의 운수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숙명적인 국가위기
계룡산천도설(鷄龍山遷都說)은 이조(이씨 왕조)가 망한 후에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도읍을 정한다는 내용으로, 역성혁명을 예조(豫兆, 앞날을 예언하는 징후) 신앙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이전 글 <머리와 처세로 출세한 얼자, 하륜>에서는 조선 새도읍 후보로 계룡산(공주), 무악 및 한양이 거론되었고, 결국 정도전이 추천한 한양이 새도읍으로 정해졌다고 언급했다. 조선시대 역모설의 주인공으로 정(鄭)씨가 주로 등장하는 배경에는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정도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계룡산이 풍수지리적으로 도읍에 적합한 공간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신묘한 산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으로,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오악(五嶽) 중 하나였다. 계룡산은 성리학의 최고 범주인 태극(太極, 우주의 중심)이 저절로 구현되는 형상으로, 이재궁궁(利在弓弓)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궁을촌(弓乙村)의 신천지가 기대된다고 믿었다. 궁을촌은 상징적인 피난처를 의미했고, 궁궁(弓弓)은 태극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계룡산은 산수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태극의 형세를 이루고 있다.
산태극(山太極) : 산맥이 지리산을 출발하여, 계룡산에서 남하
수태극(水太極) : 계룡산 신도안 계곡물이 북상. 금강과 합류한 후 다시 계룡산을 돌아 남하
정성진인출현설(鄭姓眞人出現說)은 서구종교의 메시아니즘(Messianism)으로, 말세가 쇠진한 뒤에는 정도령(구세주)이 등장하여 세계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주일주평화국은 정도령을 교주로 삼고 있으며, 정도교(이순화)는 정도령(正道令)을 정도(正道)로 해석한다.
수전으로 계승된 정감록 사본들은 아무래도 후대의 첨삭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조선왕실에서는 정감록을 금서로 지정했지만, 조선 후기 민간에서 은밀히 전승되었다. 반왕조적 사상의 주체는 의외로 지식계층(양반·중인)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 수준의 지식(천문·역수·복점·오행·풍수·파자풀이·참요 등)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정감록은 조선 후기 반역적 도당결집과 동학을 비롯한 신흥종교에 기반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동학에서 비롯한 혁세주의·후천개벽설는 증산교에 전수되었다.
오늘날의 통일교도 정감록을 신앙화하고 있다. 궁을촌의 개념과 신천지의 교리는 모두 한국이라는 특정지역에서의 종말론적 구원과 관련된 사상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만희이 설립한 신천지(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 교회는 과천을 성경에서 말하는 동방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아마겟돈 전쟁의 환란을 피하기 위한 장소가 과천에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신천지는 새 언약서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며, 14.4만명의 구원받은 자들이 영생불사체가 된다는 조건부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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