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시작될 당시만 해도 쓴맛의 아메리카노보다는 달달한 믹스커피·다방커피가 익숙했었는데, 이제는 아메리카노를 하루에 2잔 이상 마시는 시대가 되었다. 이전 글 <특권층 의리의 시대, 세도>에서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노론벽파가 천주교를 빌미로 반대파(남인)을 숙청했다고 언급했는데, 19세기 초기 조선에 들어 온 프랑스 신부들은 생명의 위협은 물론, 생활도 매우 열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병오박해(1846년)와 병인박해(1866년) 사이의 20여년 조선 천주교는 나름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었다. 철종시대 들어 조선에 있는 천주교도들의 숫자·위치가 어느 정도 파악된 상태였기 때문에, 조정도 천주교를 약간 묵인해주는 분위기였다. 평화로움이 지속되니, 프랑스 신부들은 그리웠던 본국의 식생활을 시도하거나 향유하곤 했다. 그 중에 커피가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 선교의 중심, 마카오·홍콩
1658년 파리외방전교회(MEP,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가 프랑스 파리에서 설립되었는데, 주로 유럽인이 적은 비그리스도 국가에 선교사를 파견해 복음을 전하고 각국 교회의 성장과 성직자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MEP에게 아시아(중국·일본·베트남·조선 등)는 중요한 선교대상이었다. 1685년 MEP는 중국(광동성)에 극동대표부를 최초로 설치한 후, 1732년 마카오로 이전했다.
1836년 피에르 모방(Maubant) 신부는 조선 신학생 3명(김대건·최양업·최방제)을 발탁해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에서 교육(신학·철학·라틴어·불어 등)을 받게 했는데, 이들은 조선을 떠나 만주·요동을 거쳐 6개월 만인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했다. 1845년 김대건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방인사제)로 서품되었는데, 서품장소는 남경교구 진쟈샹(金家巷, 중국 상해) 성당이었다. 17세 중반 황포강(상해) 건너 편에 김씨 가문이 모여 살던 김가항에서 유래했다.
김대건은 횡당 신학교 성당에서 조선인 사제로서의 첫 미사를 봉헌한 후, 같은 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귀국했다. 2001년 신도시 개발계획에 따라 진쟈샹 성당이 철거되었는데,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식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용인 은이성지 내에 진쟈샹 성당을 복원해놓았다. 천주교 박해시대에 신자들은 험한 산골의 교우촌에서 숨어 살았는데, 은이(隱里, 숨어 있는 마을)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다. 1836년 김대건은 은이성지에서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받았으며, 15세의 김대건이 마카오 신학생으로 선발된 것이기도 한다.
1847년 극동대표부를 마카오에서 홍콩으로 이전하면서, MEP는 포르투갈의 간섭을 벗어남과 동시에 자유로운 선교활동을 통해 홍콩을 극동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는 포르투갈 정부의 간섭이 심했던 반면, 바로 옆에 위치한 홍콩은 영국 식민지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이었다. 선교사들은 홍콩에서 경리업무를 맡으면서 한국선교를 준비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고의선이다. 1868년 고의선은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파견되었고, 2년 동안 홍콩에서 경리를 맡았다. 이후 싱가포르·상해에서 활동한 뒤, 1875년 조선으로 입국했다.
국내에 커피를 들여 온, 천주교
1860년(철종 11) 3월 베르뇌 주교(조선 천주교회 교구장)가 홍콩의 리부아 신부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에는 여러 서양식료품의 배송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내년에 조선으로 들어올 선교사 편에 이 물품들을 보내주십시오.
적포도주나 백포도주 50병들이 2상자
코냑 4다스
커피 40리브르
흑설탕 100리브르
1884년(고종 21) 조선에 우정총국(훗날 우체국)이 설립되었으니, 그 보다 23년 전의 일이다. 당시 홍콩에서 조선으로 물건을 배송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10개월이었는데, 오늘날과 같은 로켓배송·새벽배송을 생각하면 안된다. 암튼 1861년(철종 12) 조선에 최초의 커피가 들어왔다. 리브르(livre)는 약 0.5㎏에 해당하는 단위이니, 신부·신자들이 함께 마시기에 충분한 양이었다고 한다.
또 한번의 천주교 핍박, 흥선대원군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은 수 많은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처형했는데, 병인박해이다. 철종대와 달리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의 확산세를 외세의 침투로 간주했다. 조상숭배를 금지하는 천주교 교리는 유교질서를 위협하기에 충분했으며, 사회적 혼란과 반체제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동진정책으로 조선 북부를 노리고 있었고, 미국 상선(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선원이 사망했다. 외세는 조선의 문을 이래저래 두들겼지만, 섭정하던 흥선대원군은 >왕권의 강화와 전통질서의 회복을 위해 외세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1866년 9월 프랑스는 선교사 처형에 대한 보복으로 강화도를 침략했고, 이 과정에서 문화재·문서들이 약탈당하게 된다. 조선은 더욱 더 문은 닫게 된다. 1971년 미국도 5년 전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침략하려 했으나, 심한 저항에 밀려서 물러났다. 흥선대원군은 오로지 아들·가문의 권력과 이권을 위한 정책을 펼쳐 나갔는데, 흥미로운 부분은 민씨부인(흥선대원군 부인, 고종 생모)이 천주교인이었다는 사실이다.
1873년(고종 10)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후,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민씨 일가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이를 구실로 통상조약체결을 강요했는데, 결국 1876년 고종은 소수 개항론자(박규수 이유원 등)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치외법권 등이 포함된 불평등조약의 시작이었다.
이전 글 <대립하면서도 의존하는, 태극>에서는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조선조정은 수 차례 방일단을 꾸렸으며, 점차 일본과의 교류와 서구열강의 개항에 대한 압박을 받았다고 언급했었다. 어쩌면 조선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은 것이지도 모른다. 조선의 국력은 일본·서양에 비해 현저히 약했으며, 망해가는 청나라는 조선을 지원할 처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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