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도시

[역사/중국] 국적이 변화한, 화교

by Spacewizard 2025. 4. 24.
반응형
 

 

2010년대 중반 명동역 3번 출구 앞에는 동보성(東寶城, 1975년 개업)이라는 중식당이 있었는데, 친척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방문한 적이 있었다. 친척동생은 화교가문으로 장가를 가는 것이었고, 하객들 중에는 화교가 많았다. 당시 옆테이블의 대화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었는데, 상당 수의 화교 2~3세들이 강남 일대에 거주할 뿐 아니라, 직업도 전문직(특히 의사·한의사)이 많다는 것이었다. 타국으로 건너 온 외국인이 현지의 텃세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노선이 교육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전 세계 화교의 수는 6천만명 가량으로 알져지고 있으며, 현지에 동화되지 않으려는 화교의 특성상 나라마다 차이나타운이 조성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싱가포르 등)에 가장 많이 정착했고, 미국·호주·남미·유럽에는 강제노동 형태로 보내지기도 했다. 영국은 싱가포르를 무역거점으로 개발하면서, 인센티브를 주면서 말레이시아 화교를 싱가포르로 이주시켰다.

 

화교 속에서도 다른, 국적

 

조선족(중국동포)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의 하나로, 중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이다. 반면 화교는 보통 중국계 이민자를 일컫는데,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華僑) : 중국 국적 유지
(華人) : 현지국 국적 취득

(華裔) : 중국계 이민자의 자녀

 

이전 글 <정치력을 행사하는 비정치인, 벌>에서는 중국 한족을 하화(夏華)족이라 부르며, 화(華, 빛날)는 중국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라고 언급했었다. 화인은 현지국 사회에 동화된 중국계 후손으로, 화교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화예는 2세 이후의 세대를 지칭하는 말로, 현지국 태생으로 현지국 국적을 하기고 있다. 특이하게 교(僑, 더부살이)와 예(裔, 후손)를 붙였다.

 

1949년 중국본토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공산화되면서, 막 설립된 한국정부 중국과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화민국(현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화교는 국적을 대만으로 변경했고, 한국전쟁 당시 동족(중공군)에 맞서서 화교로만 구성된 한국군 특수부대가 있었다. 1951년 1월 결성된 SC지대(Seoul Chinese, 서울 차이니즈)화교청년 200여명으로 구성된 첩보·유격 특수부대였는데, HID(육군 4863부대) 소속이었다. 이전 글 <염탐을 목적으로 하는, 정보부대>에서는 1951년 3월 공작과가 정보국에서 독립하면서, 첩보분견대본부(HID)가 되었다고 언급했었다.

 

일부 지휘관은 중화민국에서 비공식적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문산·사직공원 등지에서 특수훈련을 마친 뒤, 교동도에 부대본부를 두었다. 또 다른 화교부대로는 중국인 특별수색대(제1보병사단 예하)가 있었는데, 이는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용군 성격이었다. 일부 특별수색대는 KLO(한국군 첩보부대)에도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71년 중국이 유엔 상임이사국이 되면서, 한국의 대중전략에도 변화가 생겼다. 1980년대 후반부터 비공식 교류(학술·언론·체육 등)가 늘어나면서, 1991년 상호 무역대표부를 설치하여 영사 기능의 일부를 수행했다. 1992년 한중수교(韓中修交)는 한국화교 커뮤니티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는 한국이 중국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함과 동시에 대만과는 단교하는 것이었다.

 

화교(舊華僑) : 한중수교 이전, 대만(중화민국) 국적

화교(新華僑) : 한중수교 이후,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국적

 

화교의 원류, 중국 남부

 

차이나타운의 공통된 특징은 북경어가 아닌, 복건성어(홍콩 근처)를 사용하다는 점이다. 복건(福建, 푸젠)대만섬을 정확히 마주보고 있는 위치에 있다. 과거 중국 남부의 산악지대(하이난성·관둥성·푸젠성)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바다를 통한 해상무역으로 생계를 영위해야 했다. 중국 남부인들이 불가피하게 나라를 떠나 동남아 등지에서 국적 없이 정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명·청의 해금정책(海禁政策, 쇄국) 때문이었다.

 

이후 청나라는 중국 남부인의 국적을 복원시키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동남아에서 부를 축적한 화상들이 아편전쟁으로 황폐화된 고향에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적복원 과정에서 화교라는 말이 등장했다. 당시 화상들은 유럽과 차무역을 통해 큰 부를 일궜는데, 푸젠성이 차로 유명했다. 차(茶)는 북경어로 로 읽히지만, 복건성어로는 (다·대)로 읽혔다. 오늘날 차가 영어로 티(tea)가 된 것은 화상의 영향이 컸다. 

 

인천을 통해 들어온, 조선화교

 

화교가 조선에 들어온 시점은 임오군란(1882년) 전후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제물포로 상륙한 청군 3천여명을 따라 입국한 40여명의 산동성 주민(상인·요리사)이 최초의 조선화교였던 것이다. 짜장면은 인천에서 개발된 반면, 짬뽕은 나가사키에서 만들어 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진평순(복건성 출신)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사해루를 운영했는데, 여기서 잔반을 모아 국수를 말았던 것이 백짬뽕이다. 복건성어로 찬폰은 식사를 의미하며, 일본어로 찬폰은 섞는다는 의미이다. 화교들 간의 교류 속에서 백짬뽕이 조선에 전해졌고, 이후 군산에서 백짬뽕에 고추가루를 가미하면서 오늘날의 빨간 짬뽕이 되었다.

 

짜장면는 산동반도의 패스트푸드에서 유래었다고 한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전통적으로 유명한 중식집은 공화춘(共和春, 공화국에 봄이 옴)인데, 이는 신해혁명으로 본국(중국)이 공화국이 되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자주 방문하는 곳은 백년짜장으로 유명한 만다복(萬多福, 수 없이 많은 복이 함께)인데,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짜장면을 맛볼 수 있다. 현재는 1990년대 이후 신화교 유입이 증가하면서 구화교·신화교가 혼재하고 있다. 국내 화교사회는 주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으며, 특히 인천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화교사회가 형성되어 있다. 동보성은 명동에 본점을 두고 있었으나, 현재는 선릉역 분점이 본점 역할을 하고 있다.

명동 동보성(좌)와 인천 만다복(우) 전경

명나라 귀화성씨, (호)

 

(胡, 턱밑 살)는 중국 내에서 15위권으로 많은 인구를 가진 흔한 성씨로, 한국에서는 비교적 드물다. 중국에서는 라고 발음하며, 베트남에서는 호로 부른다. 동호(몽골 유목집단, 오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1990년대 배구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후인정을 통해 후씨를 알게 된 사람이 많은데, 1995년 귀화한 후인정은 수원 호씨의 시조가 되었다. 후진타오(胡錦濤, 호금도)가 유명하다. 후덕죽은 호텔신라 중식조리총괄 출신으로, 불도장 명인으로 유명하다.

 

국내 호(胡)씨의 명나라 호극기(胡克己, 한림학사)로, 건녕(복건성) 출신이다. 1643년(인조 21) 사신(답례사)으로 왔다, 명이 멸망하면서 북청군(함경도)에 정착했다. 호세익(호극기 6세손)의 아들을 기준으로 본관이 2개(파릉·가평)로 구분되면, 국내에는 1천명대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호숙(장남) 후손 : 파릉(巴陵, 중국)

호징(2남) 후손 : 가평(加平, 조선)

호준(3남) 후손 : 가평

 

파릉은 중국 후난성 악양시 일대의 옛 지명으로, 파릉 호씨는 국내에 100명 이하가 거주하고 있다. 이는 1천명대의 전체 호(胡)씨에 비해 매우 소수이다. (胡)씨와 유사한 성씨가 호(扈, 뒤따를)씨가 있는데, 시조 호의(扈義, 호원보)는 공산전투에서 순절한 8명의 장수 중 한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본관으로는 신평·보안·나주·전주·가평·파릉이 있으며, 국내에는 4천명대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호철(호의 장남)의 17대손이 신평군(충남 당진)으로 봉해지면서 관향으로 삼았다. 제시(가수)의 본명이 호현주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