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정도 되었을 무렵, 햇살이 쏟아지는 마루 위에서 손톱을 깎아 주던 어머니에게 생뚱맞게 다음과 같이 말한 기억이 있다.
"옛날 임금보다 지금 평범하게 사는게
더 좋은거 같아요"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돌이켜보면 꽤 괜찮은 통찰력이었던 것 같다.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조선시대의 왕은 피곤한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
인간으로 내려온, 국왕
보통 조선시대 왕권은 절대으로 강할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해다. 조선은 종교의 시대에서 벗어난 인문의 시대를 열었다. 고려시대 이전까지 국왕은 신성시되었지만, 성리학은 왕을 비롯한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의 이상이 최대한 실현된 정치체계였다.
다만 신분계급은 구분되었고, 각자의 신분에 맞는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를 위한 고안한 장치가 예법이다. 예법(禮法)은 인간세계에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론을 담았는데, 신분이 높을수록 더 복잡하고 구체적으로 설계했다. 국가를 가정으로 삼아, 국왕에게 어버이(가장)으로서의 도덕적 부담을 주려 했던 것이다. 신권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국왕에서 최대한의 부담·스트레스가 가해지는 규칙을 정했을 것이다.
살인적인 스케줄, 극한직업
신진사대부는 유교(성리학)을 도입하면서 조선의 국왕을 인간으로 격하시켰고, 민주주의까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민본사상(民本思想)을 내세웠다. 민본은 백성을 위한 행정서비스라는 개념이 내재되어 있는데, 국왕이 행정주체로 전면으로 등장한 혁신적인 사상이었다. 정도전은 경복궁을 설계하면서, 일인자의 아방궁(阿房宮, Ēfánggōng)이 아닌 백성을 위한 집무공간 성격을 강화시켰다. 일부 폭군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조선 국왕은 신하로부터 과한 업무·식사를 강요 당하는 시스템에 갇혀 있었고, 스트레스와 운동부족으로 요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은 조선 국왕의 공식적 일과이다.
05시 : 기상 후, 왕실문안
06시 : 초조반
07시 : 조강
09시 : 조식
10시 : 현안보고
11시 : 낯것상 후, 휴식·산책
13시 : 주강
15시 : 참(간식), 서류업무
17시 : 점호
18시 : 석식
19시 : 석강
20시 : 왕실문안
21시 : 야식
22시 : 상소문·민원 처리
23시 : 취침
먹는 스케줄만 하루에 6번이 고정이며, 하루 3번의 경연은 각각 참석자를 달리 했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식적인 수면시간은 6시간(23시~5시)이었지만, 아마 3~4시간도 못 채웠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당일 올라온 수십 개의 상소를 읽고 처리하려면, 새벽 2시간을 넘겨 야근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때에 따라 소대(긴급회의)와 야대(야간회의)가 잡히기도 했고, 여러 여인들과의 잠자리도 미리 정해져 있었다. 최근에는 하루 6시간 수면도 부족하다는 연구결과도 많은데, 하루 2~3시간 자는 왕의 건강상태가 좋았을지 만무해 보인다.
코치와 함께 하는, 잠자리
왕의 침실은 정(井, 우물)자 형태로 9개의 방이 연결된 구조였는데, 중앙에는 왕과 여인이 사용하는 침실이 있었고, 주변 8개 방에는 숙직상궁들이 1명씩 배치되었다. 각 방들은 미닫이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왕의 침실과 접한 방의 문만 닫고, 나머지 문들은 항상 열어두었다.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편안함) 침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왕의 침소는 두 사람이 편히 누울 정도의 공간이었다. 옆방의 숙직상궁들이 왕의 숨소리부터 심기까지 치밀하게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국왕은 피로함에 지친 심신을 이끌고 새벽 2~3시에 침소에 들면, 숙직상궁(잠자리 보좌)의 코치에 따라 성관계를 맺었다. 뭐 하나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 남녀 간의 연애라기 보다는 노동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론 의무가 아닌 연애를 즐긴 왕들도 있었겠지만, 원칙적으로는 왕손생산을 위한 업무(의무)의 일환이었다.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는 특히 많은 수의 동침을 소화해야 했다.
국왕의 사랑을 거절한, 의빈성씨
국왕이 진정한 사랑에 빠진 케이스로 빠지지 않는 것이 성덕임(훗날 의빈성씨)으로, 정조가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다. 10세 무렵의 정조는 궁궐 내에서 궁녀로 근무하는 성덕임을 알게 되었고, 15세에 자신의 연모를 처음으로 고백했다고 한다. 이후 정조는 15년 가량이나 성덕임에게 마음을 표현했지만, 성덕임은 2차례에 걸친 청혼을 거절했다. 조선시대 성은은 누구나 얻고 싶어하는 기회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성덕임은 승은(承恩, 은혜를 받음)으로 인해 삶이 크게 변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부담감이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성덕임은 정조의 간절한 구애 끝에 승은을 받아들였고, 정조도 자신의 유일한 승은후궁으로 삼았다.
의빈성씨는 문효세자를 낳았지만, 정조는 문효세자를 원자로 정하기를 주저했다. 당시 의빈은 후궁이 아닌 궁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론의 요구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의 세자책봉을 받게 되는데, 생후 3개월 만에 원자로 삼은 이후, 22개월 만에 원자를 세자로 책봉된 것이다. 하지만 1786년 5세의 문효세자는 홍역으로 사망했고, 얼마 후 출산을 1달 앞둔 의빈성씨도 죽게 된다. 정조는 의빈성씨의 비문을 직접 쓰면서, 연모(戀慕, 사랑하여 간절히 그리워함)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빈성씨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조정에서 독살설이 거론되었는데, 홍국영이 상계군(은언군 아들)을 세자로 올리기 위한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참고로 은언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으로, 사도세자의 서장자이다. MBC가 의빈성씨를 소재로 한 드라마 2편 방영했는데, 2007년 이산과 2021년 옷소매 붉은 끝동이다. 이산에서는 성송연(한지민 분)으로 개명하였고,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성덕임(이세영 분)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민원의 나라, 조선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민원의 나라이다. 조선에서의 상소는 누구나 올릴 수 있는 민원서였지만, 백성은 주로 읍소(泣訴)의 형태로 민원을 올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1846년 15세의 초월(楚月, 용천기생)이 헌정에게 상소를 올렸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 내용은 각 고을의 남양(納糧, 세금납부)에 대한 불편함과 향안(餉安, 품안세계)을 정비하는 방안을 담고 있는데, 기녀가 조선행정에 대한 이해와 건의 수준이 높았다는 점에서 놀랍다.
물론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상소는 신권의 정치적 압박수단으로, 한자를 쓸 줄 아는 사대부만 올렸다. 만인소(萬人疏)는 유생들이 정책에 대한 의사를 집단적으로 밝힌 상소로, 정책에 반대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지부상소(持斧上疏, 도끼상소)는 죽음을 불사하는 자세로 도끼는 앞에 내려놓고 상소를 올린다.
읍소민원은 왕이 처리를 해야만 했는데, 1401년(태종 1) 신문고 제도가 도입되었다. 궁궐 앞에 설치된 큰 북(신문고, 申聞鼓)를 쳐서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중국 요임금이 백성의 의견을 듣기 위해 감간지고(敢諫之鼓)라는 북을 두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누구나 신문고를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주로 형사·가사와 관련한 중대한 사건당사자가 대상이었다. 대기기간만 6개월 이상이 소요되었던 신문고는 폐지·설치를 반복하다가, 격쟁으로 대체가 되었다.
격쟁(擊錚)는 국왕이 궁궐을 나설 때나 행차할 때 징·꽹과리를 치면서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것이다. 사실상 왕이 민원을 받아줄 때까지 소음으로 괴롭히는 행위이다. 격쟁도 제한된 경우에 한해서 허용되었으며, 이유 없는 격쟁은 처벌대상이었다. 상원(上言)은 사실상 민사소송으로, 그 대상에 따라 관할부서가 의금부(양반·관료)와 형조(사대부·평민·하층민)로 구분되었다.
조선 국왕은 재위기간 동안 악성민원에 해당하는 격쟁·상원을 상당히 많이 처리해야 했는데, 격쟁·상원을 제기하던 조선백성의 기질이 오늘날의 한국인의 기질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닌지 싶다. 국가지도자를 자신을 위한 도구(공무원)으로 생각하며, 국가지도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20세기 들어 파면된 대통령만 2명인데, 현대민주주의에서 필요한 저항정신이 왕권사회였던 조선시대부터 600년 이상 트레이닝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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