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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관직] 예로부터 문(文)의 상징, 한림

by Spacewizard 2025.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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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대학시절 자격증 준비를 위해, 몇 개월간 노량진의 한림법학원을 다닌 적이 있었다. 좁은 빌라골목의 끝에 위치했던 학원건물(소농빌딩)은 현재 메가소방학원이 운영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식사를 즐겨하던 바지락칼국수(노량진 초등학교 옆 골목)이 가끔 생각난다. 2008년 윌비스는 한림법학원을 인수하면서 법학·고시 전문 교육사업에 진출했고, 윌비스 한림법학원이라는 통합브랜드를 사용 중에 있다. 근데 한림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한림원을 상징하는, 노벨상

 

2024년 한강(작가)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국내 2번째 노벨상의 영광을 안았다. 노벨상은 분야마다 선정기관이 다음과 같이 다르다.

 

생리의학상 :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

물리·화학·경제학상 : 스웨덴 왕립과학원

문학상 : 스웨덴 한림원

평화상 :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1786년 구스타브 3세은 스웨덴어·스웨덴 문학 진흥기관으로 스웨덴 아카데미(Swedish Academy)을 설립했고, 동양에서는 이를 한림원(翰林院)으로 번역했다. 과거에는 노벨상 선정기관을 스웨덴 한림원으로 통칭했지만, 최근에는 문학상을 선정하는 기관만을 지칭한다. 한(翰, 새깃·붓)을 든 학자들이 림(林, 숲·집단)처럼 고담준론을 나눈다는 의미에서 지어졌고, 이후 관행적으로 학술·연구단체를 한림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웨덴 한림원 @스톡홀름 [출처:위키백과]

문관 엘리트의 상징, 한림학사

 

당나라 현종대 왕립학술기관인 한림원이 최초로 설치된 이후, 이후 여러 왕조와 한반도에서도 한림원 직제를 계승했다. 한림학사(翰林學士)는 한림원에 소속된 관리로, 주로 황제교서 기안, 국가문서 작성, 각종 학술·문예사업 등을 담당했다. 당나라를 대표하는 한림학사로는 이태백(李太白, 이백)이 있는데,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불린다. 이태백은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으며, 젊은 시절에는 항상 검을 차고 다니며 협객을 자처하는 자유로움과 호탕함을 가지고 있었다. 관직은 오래 유지하지 못했는데, 이는 양귀비와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에서는 과거급제자 중에서도 학문·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인재, 또는 황제로부터 심임받는 이들이 한림학사가 되었고, 국자감 졸업생 중에서 특채되기도 했다. 한림학사는 당시 문화·정치 엘리트그룹을 상징했기에, 문관 최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았다.

 

국자감(國子監)은 수(隋)에서 설치된 중앙관학으로서, 이후 중국 교육체계의 최고학부의 역할을 했다. 명나라는 기존 남경(南京) 외에 북경(北京)에도 국자감을 설치하였고, 1365년 교원조직을 마련하면서 조직적 기반을 갖췄고, 1367년 정식관직으로 편제되었다. 당시 마련된 교원조직 중에는 오늘날 익숙한 박사(博士)·조교(助敎)이 있었고, 국자감 내부에는 부속기관으로 태학(太學)·국자학(國子學) 등이 있었다. 명나라 국자감은 동시대 동아시아(조선·일본·류큐·베트남 등)의 국가 최고 교육기관 모델에 영향을 미쳤다.

 

한반도에 한림을 도입한, 신라

 

당시 한반도에서도 중국 한림원을 본떠서 만든 국가기관이 있었는데, 통일신라의 한림대(翰林臺)이다. 고려 태조는 한림원과 한림학사 직제(정4품 2명)를 설치했다. 1311년(충선왕 3) 한림원이 사림원(詞林院)으로 개칭되면서, 한림학사의 품계도 정3품으로 승격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사림원은 문한서(文翰署)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공민왕의 개혁과 맞물려 있었다.

 

고려 최고 문장가 중의 한명으로 알려진 이규보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주당이다. 이규보는 20대 초반에 과거에 합격했지만, 40살에 겨우 최충헌으로부터 관직(한림원 8품)을 얻게 된다. 하지만 6년 동안 승진을 못한 채 8품에서 머물다가, 이후 최충헌과 최우(최충헌 아들)의 신임을 받으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규보의 입신양명을 막은 것도 술이었지만, 대기만성의 근원 또한 술이었다. 술로 인해 과거시험의 성적이 저조했지만, 술에 취한 상태에서 쏟아내는 천재적인 문장이 기가 막혔던 것이다.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서는 한림원이 지밀(至密)한 위치에 있으며, 학사는 내한(內翰)의 왕을 가까이 모시는 내상(內相)의 높은 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원나라의 사위, 충렬왕

 

고려 후기 원종·충렬왕은 원나라에 의존하는 정책을 펼쳤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면서 원나라의 부마(駙馬)가 되었는데, 원나라 세조(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된 것이다. 이전 글 <한때 한반도 외교를 이끈, 위구르>에서 제국공주는 고려왕실과 결혼한 최초의 몽골왕족이라고 언급했었다. 원나라는 부마국의 내정에 크게 간섭했는데, 고려를 동녕부(東寧府)로 불렀으며, 서경(현 평양)을 원나라 직속령으로 잠시 편입하기도 했었다.

 

충렬왕대 원나라의 권력구조에 편승한 권문세족(權門勢族)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왕권은 위축되었고, 이는 중앙집권적 통치를 한계가 드러냈다. 이전 글 <정치력을 행사하는 비정치인, 벌>에서는 권문세족은 이전의 문벌귀족에 비해 관료적이며, 귀족사회에서 관료사회로 발전하는 과도기 단계의 지배층이라고 언급했었다. 이 시기에 유입된 많은 중국문화 중에는 성리학이 있었는데, 결국 관료제에 바탕한 조선건국의 이념적 바탕을 제공했다.

 

1308년 충선왕(충렬왕 아들)은 원정(元廷, 원나라 황실)의 지지 속에서 즉위했는데, 원나라 세조의 외손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선왕은 권문세족의 부패 척결과 내정쇄신을 목표로 다양한 제도개혁을 추진했는데, 능력주의 인재선발을 추진하려 했고, 성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즉위 5년만인 1313년 충선왕은 퇴위되면서 심양왕(瀋陽王)으로 봉건되었고, 이후 주로 원나라에 체류하게 된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중에서도 글솜씨가 뛰어난 사람을 예문관(禮文館)에 배치했는데, 예문관 검열(檢閱)을 한림학사라고 불렀다. 윤덕선은 한림대학교의 설립자로, 대학명을 직접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림대학교 졸업생이 한림학사처럼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태백이 지은 옥호음(玉壺吟, 옥으로 만든 술병)은 맑고 귀한 술과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다음의 문장이 있다.

 

세인불식동방삭(世人不識東方朔)

대은금문시적선(大隱金門是謫仙)


세상사람들이 동방삭을 못알아 보지만, 동방삭이 금문 뒤에 숨은 귀양 온 신선이라고 표현한다. 금문(金門)은 황제가 머무는 궁궐의 문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를 한림원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이전 글 <잠실과 함께 쓸모 있어진, 탄천>에서는 동방삭이 신선이었으나, 인간세계로 쫒겨나 무제의 신하가 되었다고 언급했었다. 하지만 전한은 당나라보다 수백년은 앞선 시대라서 한림원이 있을지 만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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