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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고려] 고려시대 소송 전문, 지부

by Spacewizard 2025.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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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옥씨부인전은 천민 구덕이(임지연 분)이 어떤 사건으로 양반으로 위장하여 외지부로 활동하는 스토리다. 전근대에도 소송을 전문분야로 하는 법률전문가가 있었다는 것이 흥미로웠고, 천재성을 지닌 천민이 신분사회의 족쇄를 뛰어 넘는다는 환타지는 흥미로운 소재임에 분명하다. 별의 별일이 다 일어나는 인간사회에서 드라마는 끊이질 않는데, 다만 드러나지 않았거나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현실판 옥씨부인, 조두대

 

옥씨부인의 현실판을 꼽으라면, 광평대군 집안의 노비였던 조두대(曺豆大)가 있다. 노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조두대는 한문·이두에 능통하였다. 당시 왕가의 여인들도 글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지식습득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영순군(광평대군 아들)의 유모였던 조두대는 영순군의 시중을 들기 위해 궁에 들어갔지만, 영순군이 출궁한 이후에도 궁녀로 남아 주로 문서작성 업무를 수행했다. 오늘날 궁체의 원조가 조두순의 한글필체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사실여부는 알 수가 없다.

 

조두대는 세종의 명으로 석보상절의 제작에 참여했는데, 석보상절(釋譜詳節)은 수양대군이 주도적으로 편찬한 불경언해서였다. 이 때의 연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세조도 조두대를 불경 번역작업에 참여시켰다. 범어에도 능했던 조두대는 불경번역에 핵심인력이었는데, 세조와 대신 앞에서 직접 번역본을 낭독했다고 한다. 세조가 죽은 후에는 성종대 수렴청정을 하였던 정희왕후(세조 비)의 측근으로도 활약했는데, 문자를 아는 조두대가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조두대는 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내알을 이용하여 큰 부를 찾았다. 하늘이 내린 능력·운은 신분도 뛰어 넘는 모양이다.

 

전통시대에도 존재했던, 소송전문가

 

도관지부(都官知部)노비문서·소송을 맡은 고려시대 관청으로, 도관 밖에서 지부행세하던 사람을 외지부라 하였다. 외지부(外知部, 밖에 있는 지부)는 조선시대 소송·법률지식이 부족한 백성들을 위해 소장작성·법률자문·소송대리 역할을 하던 이로, 관원이 아닌 법률전문가였다. 고려시대 지부(知部)는 귀족가문의 이권을 다룰 정도로 권력이 막강한 자리였다.

 

조선시대 들어 노비송사가 증가함에 따라, 1467년(세조 13) 소송 전담기관을 도관에서 장례원으로 독립시켰다. 장례원(掌隷院)노비의 부적(簿籍)과 소송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다음 사법삼사(司法三司) 중 하나였으며, 판결사라는 직제가 있었다.

 

사헌부(司憲府)

한성부(漢城府)

장례원(掌隷院)

 

외지부는 오늘날의 변호사와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금전적인 대가를 취했는데, 업무수행 과정에서 소송을 부추기거나 문서를 조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1478년(성종 9년) 외지부의 활동이 전면금지되었는데, 외지부로 인해 불필요한 소송 증가와 재판 장기화가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나 보다. 하지만 조선 후기까지도 외지부는 은밀히 활동을 했는데, 백성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변호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1764년(영조 40) 장례원의 역할이 형조로 귀속되면서, 판결사의 직제도 함께 폐지되었다.

 

경국대전에서 구색 갖춘, 삼심법


조선시대 소송은 구술·서면으로 제기되었다. 오늘날의 소장(訴狀)을 소지단자(所志單子, 소지)라고 불렀는데, 단자(單子)는 양반이 직접 본인명의로 제출하는 소장이다. 소송은 송한(訟限) 내에 제출해야 했는데, 분쟁발생시부터 5년이 일반적인 송한이었다. 송한을 도과한 경우에는 그 누구도 다툴 수 없었다. 당사자주의·변론·증거에 따라 재판한 후, 2통의 판결문을 작성하여 승소자·관아가 1통씩 보관했다. 소송결과에 대한 상소절차로 항소(형조)·상언(국왕)이 있었다.

 

민사재판에서는 판례법·관습법이 적용되었는데, 판결의 확정력은 오늘날과 비교하여 매우 약한 수준이었다. 판결의 최종 확정은 심급과 무관하게 득신법(得伸法)에 따랐다. 고려 말기 5번의 소송에서는 3번 승소자를 확정하고, 3번의 소송에서는 2번 승소자를 확정했다. 조선 초기에는 이도득신법(二度得伸法)이었는데, 이는 2번의 소송에서 2번 승소자를 확정시키는 것이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삼도득신법(三度得伸法)를 규정하고 있는데, 초기에는 3번의 소송을 연승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1651년(효종 3) 3번의 소송에서 2번 승소하는 것으로 하였는데, 이는 2번 패소한 자는 더 이상 제소를 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1711년(숙종 37) 단송(短訟, 간단한 소송)에서는 3번의 승소자를 확정토록 했다.

경국대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대명률의 특별법, 경국대전

 

1455년(세조 1)  세조는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당시까지의 법들을 집대성하여 경국대전을 만들었다. 1460년(세조 6)에 시작하여 1485년(성종 16)까지 약 25년 동안 만들어진 경국대전은 6전(六典)체제에 따라 다음으로 구성된다.

 

이전(吏典, 이조) : 관리 인사, 행정 전반
호전(戶典, 호조) : 경제(재정·조세·토지), 인구(호적)
예전(禮典, 예조) : 의식(예법·의례·교육), 외교
병전(兵典, 병조) : 국방(병무·군사) 전반
형전(刑典, 형조) : 사법(법률·재판·형벌)
공전(工典, 공조) : 건설·토목·도량형·산업·기술

 

경국대전의 형전 서두에 명시된 용대명률(用大明律)은 대명률(명나라 형법 법규집)을 적용하는 규정이 포함되었음을 의미했는데, 사실상 대명률이 일반형법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경국대전의 형전은 특별법적 성격으로, 신분·통치질서에 관한 규정 정도만 포함되었다. 1367년 주원장(명나라 태조)은 대명률 제정작업을 시작하여, 1397년까지 약 30년 동안 4차례의 개정을 거쳐서 완성되었다. 대명률은 당나라 법률을 참고했으며, 유교사상에 기반하고 있다. 1404년(태조 4) 조선에서는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가 출간되었는데, 이는 관리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이두를 섞어 직해한 버전이었다.

 

경국대전이 조선건국 후 100여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었는데, 이는 조선사회의 질서가 자리잡는데 걸린 시간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경국대전은 조선를 통치하는 최고의 법전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속대전·대전통편(정조)·대전회통(고종) 등의 여러 법전들이 등장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서둘러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임금의 줄행랑에 분개한 난민(亂民, 어지럽히는 백성)들이 공사노비의 문서가 보관된 장례원과 형조를 방화했으며, 이 때 3개의 궁궐(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모두 전소되었다. 결국 조선궁궐의 파괴는 국가권력에 대한 민중(특히 천민)의 불만 표출이었는데, 피난길에 뒤돌아 검게 피오르는 연기(내부불만)를 보고 선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스스로의 무능함에 대한 한탄, 아니면 일단 살고 보자는 본능에 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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