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일본 메이지유신의 주역은 원래 쇄국파였는데, 10년 만에 완벽한 변신을 꾀했다. 1853년 미국 흑선(黑船, 검은 증기선)의 등장은 일본인에게는 말 그대로 블랙스완이었다. 1854년 막부는 천황과의 상의없이 미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하였고, 이에 하급무사(사쓰마번·조슈번)들이 존왕양이(尊王攘夷, 천황을 옹립하고 오랑케를 물리침)를 내걸고 막부타도에 나섰다. 하지만 서양군대의 무력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으며, 이에 1863년 사쓰마번·조슈번은 적극적으로 개항파로 변신했다.
국가개조의 시작, 유신
당시 토막파(討幕派, 칠 토)는 막부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인 반면, 좌막파(佐幕派, 도울 좌)는 막부를 돕는 세력이었다. 메이지천황을 앞세운 토막파는 좌막파를 누르고,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 막부가 천황에게 통치권 반환)을 통해 왕정복고에 성공했다. 800년 가량 이어온 3대 막부(가마쿠라·무로마치·에도)의 쇼군정치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일본은 10년 만에 열강에 진입했고 급기야 한반도를 병탄했으니, 국가지도자의 탁월한 선택이 이뤄낸 성과였다.
1868년 4월 메이지천황은 시신덴(교토황궁 정전)에서 천지신에게 제사를 올렸고, 개혁을 천명하는 5개조 어서문(御誓文)을 발표하면서 메이지유신을 선포했다. 천황 중심의 왕정복고를 이끌어 낸 쿠데타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 글 <서비스 품질이 낮은 수출품, 전자개표기>에서 쿠데타를 3가지로 구분했었는데, 변혁적 쿠데타와 친위쿠데타의 성격이 섞여 있지 않나 싶다.
메이지유신의 목표는 모든 것을 서양식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으로 진입)라 한다. 입헌군주국의 기틀을 마련한 신정부는 부국강병을 위한 여러 개혁조치들을 시행했는데, 대표적으로 중앙집권제·행정개편·신분철폐·징병령·육식권장·서양사절단·학제개편·사법정비·중앙은행·우편제도·전신망·철도망 등이었다.
5인의 영국유학파, 조슈 파이브
요시다 쇼인은 쇼카손쥬쿠(현 야마구치현 하기)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유신의 핵심적인 교육기관이었다. 쇼인은 양이를 위해서라도 서양을 잘 알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1859년 29세의 쇼인은 반역죄로 참수되었다. 쇼인이 죽고 4년이 지난 1863년, 젊은 하급무사 5명은 근대적인 기술·문명을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밀항했다. 2006년 이들을 다룬 일본영화 조슈 파이브가 개봉되면서, 이들을 조슈 파이브라 부르고 있다. 조슈 파이브는 일본의 근대화와 메이지유신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변혁과 발전(군국주의·제국주의)을 이끌었다.
이노우에 카오루(밀항 당시 27세) : 외교의 아버지
엔도 긴스케 (27세): 조폐의 아버지
야마오 요조(26세) : 공학의 아버지
이토 히로부미(22살) : 초대 내각총리
아노우에 마사루(20세) : 철도의 아버지
이토 히로부미는 쇼카손쥬쿠의 막내 뻘이었으며, 메이지정부의 초대 내각총리를 지냈다. 조슈번에 이어 사쓰마번이 영국으로 유학생을 보내면서 막부타도의 기세가 확산되었다.
쇼카손쥬쿠 출신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있는데, 그는 민간기병대를 창설하여 제2차 조슈정벌을 승리로 이끌었다. 1864년 막부의 제1차 조슈정벌에서는 조슈군이 항복했지만, 1866년 제2차 조슈정벌에서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세습정치를 이어왔던 아베 신조와 그의 부친(아베 신타로)는 신사쿠에서 신(晋)자를 따왔다. 청일전쟁 종전회담이 개최된 시모노세키도 야마구치현에 위치했는데,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이 양국의 대표로 참석했다.
혼란을 중재했던, 료마
쇼인은 여러 유신주역들을 배출했는데, 그 중에서도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카모토 료마는 지금까지도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도사번(현 고치현) 출신인 료마는 삿쵸(薩長, 사쓰마·조슈)동맹을 이끌어 내면서, 일본 내전화·식민지화를 막는데 큰 기여를 했다.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 : 해군군벌 중심지
조슈번(현 야마구치현) : 육군군벌 중심지
료마는 일찍이 탈번하여 서양의 학문·병법을 익혔다고 하는데, 당시 탈번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범죄였다고 한다. 에도막부에 거주이전의 자유는 없었다. 료마는 서양의 해군력을 목도하면서 충격을 받았으며, 부국을 위해서는 하나의 일본으로 통합하여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료마는 막부체제 하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가츠 카이슈를 암살하려고 찾아 갔다. 가츠는 막부의 고위관리였지만, 료마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결국 살의를 가지고 찾아간 료마는 마음을 바꿔 가츠에게 가르침을 구하게 된다.
신정부군은 신무기와 훈련된 병력을 바탕으로 막부군을 연파하면서, 에도성 공략을 앞두고 있었다. 에도성을 방어하던 가쓰는 사이고와의 협상을 통해 막부 핵심층(도쿠가와 일족 포함)의 신변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에도의 문을 열어주었다. 즉 사이고의 무혈입성이 막부시대를 종식시킨 시작점이 되었다. 사이고·가쓰 간의 협상이 있기 이전에, 료마·가쓰 간의 공감이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영웅들 간의 갈등, 조선
이후 료마는 메이지유신 직후 좌막파 신선조에 의해 암살되면서, 새로운 정권의 운영에서 참여하지 못했다. 유신 이후 정치권 실권을 잡은 다음의 3명을 유신 3걸이라고 한다.
사이고 다카모리(1877년 50세 사망, 자살) : 사쓰마번
오쿠보 도시미치(1878년 49세사망, 암살) : 사쓰마번
키도 다카요시(1877년 45세 사망, 병사) : 조슈번
사이고·오쿠보는 동향 출신의 친구였지만, 정한론(征韓論, 세이칸론)을 두고 대립하게 된다. 1872년 사이고는 조선정벌을 제안했지만, 내치에 초점을 둔 오쿠보는 부국강병이 우선이라고 반대했다. 한(韓)은 대한제국(1897년 개국, 대한국·구한국)이 아닌 한반도의 삼한시대에서 따온 글자이다. 원래는 정한론이 아닌 정조론(征朝論, 조선정벌)이 맞지만, 왕정복고를 막 시작한 일본 입장에서 천황의 조정을 정벌한다는 의미로도 중의적으로 읽힐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오래 전 역사에서 네이밍되었다. 참고로 구한말(舊韓末, 구한국 말기)는 좁게는 대한제국 시기를 의미하지만, 흔히 조선말기까지 를 포괄하여 쓰이고 있다.
사이고는 오쿠보에게 패한 후 낙향하였었는데, 이후 측근 사무라이들과 벌인 세이칸전쟁에서 패배·자살했다. 사이고는 자신이 지휘하던 신정부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변혁기였기에 놀랍지 않은 일이다. 정치적 원한을 많이 샀던 오쿠보도, 사이고가 죽은 다음 해에 암살되었다. 오늘날 일본의 번영은 혼란기에 목숨을 아끼지 않은 여러 인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치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할 수 있는 살신성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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