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도 국내 최대 학연집단은 KS(경기고·서울대)였으며,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관료·정치권에서는 KS출신이 허다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는 인상 깊은 인물은 이회창·한덕수가 있는데, 1953년 경기고를 졸업한 이회창은 아버지·형제가 모두 경기고를 졸업했다고 한다.
실제 1970년 경기고 졸업생 80% 이상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인데, 명문학교로의 명성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성제일고보)은 경기고의 전신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가장 많은 합격생을 배출한 학교가 경성제일보고였다. 1973년 고교평준화가 시행되기 전까지 경기고는 국내 최초·최고의 명성을 이어왔다.
조선인 중등교육기관, 고보
일제강점기 조선인 엘리트를 언급할 때, 고보(고등보통학교) 출신이라는 표현을 한다. 고보는 초등교육을 마친 조선인들이 진학하는 중등교육기관으로, 1938년 일본인 중등교육기관과 같이 중학교로 명칭이 통일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고등학교는 고등교육기관으로, 대학 본과를 진학하기 위한 예과 과정으로 볼 수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는 고등학교가 없는 대신, 1924년부터 경성제국대학에 예과 과정을 설치했다.
일제는 1911년 고등보통학교를 인가하기 시작했는데, 고보졸업자는 조선인 사회에서 높은 대우를 받았다. 다음 관립고보가 명문학교로 유명했다.
경성제일고등보통(1900년 설립, 관립한성고등) : 현 서울 경기고
평양고등보통(1909년 설립, 관립평양고등) : 현 평양제2중학
대구고등보통(1916년 설립) : 현 대구 경북고
경성제이고등보통(1921년 설립) : 현 서울 경복고
조선인 엘리트의 산실, 경성제일고보
1900년 10월 관립한성중학교(4년제)가 화동 홍현의 언덕에 설립되었는데, 심상과를 설치하여 소학교(고등과) 졸업생을 입학대상으로 했다. 심상(尋常)은 「평범·보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호머 헐버트(Hulbert)가 관립한성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헐버트는 그 이전에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근무했었다.
1886년 설립된 육영공원은 최초의 근대관립학교로, 최초의 근대학교는 원산학사(1883년 개교)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영어에 능숙한 조선인을 양성할 필요가 생겼으며, 1882년 보빙사로 미국에 방문했던 민영익은 영어교육을 위한 근대식 교육기관 설립을 계획했다. 1884년 고종으로부터 육영공원 설치허가까지 받았으나, 갑작스런 갑신정변으로 인해 2년 후인 1886년에 설립되었다. 현직관료 내지 고관의 자제만이 입학할 수 있는 신분적 제한을 두었기에, 사실상 조선판 명문귀족공립학교로 인식되고 있다.
1906년 9월 관립한성중학교는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편되면서, 교과목이 확대되었다. 1911년 11월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이 변경되면서, 일본인 교장 아래에서 실과 위주의 교육을 실시되었다. 1921년 4월 1일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되면서, 수업연한이 일본인의 중학교와 동일한 5년으로 연장되었고 조선인 학생들의 일본 진학이 가능해졌다. 당시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훗날 경복고)가 개교를 했다. 1922년 4월 경기도로 이관되면서,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되었다.
1938년 4월 경기공립중학교로 교명을 변경되면서, 수업연한이 4년으로 단축되었다. 당시 경성부(京城府)는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이 시기 신축된 교사는 학교건물로서는 최초로 철근콘크리트 구조였으며, 스팀난방시스템을 갖췄다. 1946년 9월 경기중학교로 개편되면서, 수업연한이 6년으로 연장되었다. 오늘날로 보면 고등학교 과정까지 중학교에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참고로 해방 직후 교명에 서울 타이틀을 가져간 중학교는 경성중학교(훗날 서울고)였다.
중학교(6년제)가 중학교·고등학교로 분리된 시점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이었다. 1951년 경기중학교도 경기중·경기고로 분리·개편되면서, 각각 3년제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통신부대가 화동 교사를 사용하다가, 1956년 경기고로 반환했다. 1971년 경기중학교는 폐교되었고, 1974년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를 개교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는 삼성동(현 강남구)으로 교사를 신축·이전했다.
정독도서관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화동
화동은 조선시대 장원서에서 유래되었는데,조선시대 장원서(掌苑署)는 절기에 맞춰 궁궐에서 사용할 과실·꽃·나무를 키우던 관서였다. 또 다른 설로는 원래 화기동(火器洞)이었던 것이 화개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유래가 있는데, 당시 총포를 만드는 화기도감(火器都監)이 위치했었다고 한다. 오래된 도시 내의 거대부지에는 역사적 사건의 흔적이 남아있기 마련인데, 현재의 정독도서관 부지가 저토록 넓게 확보된 계기는 갑신정변이었다.
갑신정변 가담한 역적의 재산은 국가에 몰수되었고, 집은 헐렸다. 김옥균·서재필은 정독도서관 부지에 살았고, 현재 서울교육박물관(1927년 신축 추정) 부지가 김옥균의 집터로 추정된다. 김홍집은 김옥균의 집 앞에 살았다고 한다. 이전 글 <여러모로 권력을 노렸던 공간, 헌법재판소 터>에서는 정독도서관 앞의 고개가 홍현이었고, 성삼문 집터가 정독도서관 부지였다고 언급했었다. 관립한성중학교 단층교사는 서재필의 서양식 주택을 개보수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서울시는 경기고 교사를 인수한 후, 1977년 1월 정독도서관을 개관했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옥균의 첫 관직은 성균관 사서였고, 죽은 후에는 규장각(왕실도서관) 관직으로 추증되었다. 1872년 22세의 김옥균은 문과(알성시)에 장원급제하여, 그 해 성균관에서 도서출납을 담당하는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1894년 김옥균은 프랑스에서 만난 홍종우(온건개화파,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에 의해 중국 상해에서 암살되었고, 그 시신은 국내로 송환되어 능지처참된 후 버려졌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김옥균은 규장각(왕실도서관) 관직(종2품 내지 종3품)으로 추증되었다.
헐버트도 도서관과 인연이 깊다. 1898년 대한제국은 대관정(大觀亭, 헐버트의 집)을 매입한 후, 귀빈 접대·연회를 여는 영빈관으로 이용했다. 이후 1927년 대관정은 경성부립도서관(현 남산도서관)의 2번째 터가 되었고, 헐버트가 교편을 잡았던 관립한성중학교는 박정희 정권에서 정독도서관이 들어섰다. 1922년 10월 경성부립도서관이 개관한 곳은 명동의 한 2층 건물(한성병원)이었다. 이용객의 증가로 대관정으로 이전한 경성부립도서관은 해방 직후 1945년 9월 서울시립종로도서관으로 변경된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울시립남대문도서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65년 후암동(용산구)에 현대식 도서관 전용 신축건물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남산도서관으로 명칭이 바뀐 것이다.
친일파의 흔적도 하나의, 역사
매국노 박제순의 집터도 정독도서관 부지에 있었다. 1883년 문과(별시)에 급제한 박제순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관직을 시작하여, 외교분야의 최고위직까지 승승장구했다. 박제순이 출세하게 된 계기는 갑오농민군의 성공적인 진압이었는데, 1894년 박제순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외부대신이었고, 1910년 6월 일제에 경찰권을 넘길 당시에는 내각총리 서리, 이어 8월 경술국치 당시에는 내부대신이었다.
정독도서관 동쪽 담장 너머에는 1913년 한상룡은 접객을 목적으로 건립한 한옥(가회동)이 있는데, 한상룡은 조선재계의 1인자로 불린 친일은행가였다. 한상룡이 지은 집이 최선익을 거쳐 백인제가 소유하게 되면서, 백인제 가옥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주택은 근대건축재료(유리·벽돌 등)을 사용하였으며, 대청에 문을 달아서 실내공간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아파트 발코니 확장으로 실내공간을 확보하듯, 이는 일제강점기 근대한옥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1920년 1월 동아일보사는 화동 중앙학교 건물에서 세워졌는데, 정독도서관 바로 앞의 한옥을 임차하여 시작했던 것이다. 1926년 12월 동아일보사가 황토현으로 사옥을 이전한 후, 중외일보사가 사옥으로 이용했다. 이전 글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나서, 요정>에서는 경성 명월관의 위치가 황토현(현 동아일보 사옥 부지)라고 언급했었는데, 동아일보사가 황토현을 사옥공간으로 선택한 이유는 조선총독부를 한 눈에 감시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동아일보사의 이런 취지가 사실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2018년 2월 문재인은 친일행적을 이유로 인촌 김성수의 서훈을 취소했다. 이후 후손이 대통령을 상대로 제기한 서훈취소결정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2024년 4월 대법원은 유가족에게 패소판결을 내렸다.
이전 글 <조선내내 왕가의 공간, 서울공예박물관 터>에서는 안국동사거리에서 북쪽으로 뻗은 감고당길은 예전부터 운치를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라고 언급했었다. 감고당길을 따라 북쪽으로 걷다보면, 그 끝에 정독도서관의 입구가 나온다. 아마도 홍현일 것이다. 평일에도 관광·여유를 찾아 홍현을 통행하는 이들이 많은데,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에서 과거 이 길을 지나다니던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려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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