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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이권이 많았던 계약직, 별감

by Spacewizard 2025.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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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용자·피고용자는 노동에 대한 대가에 대해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그 지급시기도 근로계약에 따라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 물론 최근 MZ알바에 대한 폄하도 많은데, 능력·책임감·예의도 없으면서 권리만 찾는다는 것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노동의 가치가 지금처럼 높이 평가받는 시대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노동에 대한 대가가 오늘날의 개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급여를 화폐로 받지 못했던, 조선

 

우선 화폐경제가 활성화되지 않은 만큼, 대부분 토지수조권·현물로 지급받았다. 이 또한 일부 정규직만 지급받았으며, 상당수의 관리들은 대가없이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녹봉제백성으로부터 거둔 현물을 관등에 따라 관료에게 지급한 보수체계로, 녹봉(祿俸)은 주로 녹(쌀·보리 등의 곡식), 봉(비단), 베 등으로 지급했다. 1556년(명종 11) 직전(職田, 관료에게 지급하는 토지)지급이 중단되면서 녹봉만을 지급하는 단일보수체제가 되었다.

 

조선은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였으나, 세록(世祿, 대대로 녹을 이어받음)의 폐해가 발생했다. 이에 1466년(세조 12) 8월 직전법(職田法)을 시행하면서 현직관리만이 직전을 받게 되었다. 관료들은 퇴직 후 노후자금이 사라짐에 따라 반발이 컸고, 현직에 있을 때 과다한 수조(전조 수취)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470년(성종 1) 4월 막 재위에 오른 성종은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통해 직전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는데, 이는 국가가 직접 직전의 소출을 거두어서 관리에게 분배하는 제도였다. 관리의 직전으로의 접근을 분리시키면서, 국가는 농민으로부터 직전세(職田稅)를 직접 수취한 것이다. 조선의 직전은 16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고, 명종대 거듭되는 흉년·왜침으로 재정이 악화되었다.

 

계약직 천국, 조선

 

조선은 만성적인 재정부족에 시달려야 했기에, 근무처가 있다고 하여 모두 녹봉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관직은 크게 다음과 같이 구분되었다.

 

(實職) : 근무처(실무)가 있는 직책

직(散職) : 벼슬(품계)은 있으나, 근무처(실무)가 없는 직책

 

녹봉을 받지 못하는 관리(무록관·서리·사령) 비율이 훨씬 많았는데, 무록관(無祿官)은 품계를 얻은 양반임에도 녹봉을 받지 못하는 관리를 말한다. 궁궐 내 관원 중에서 교서관·사옹원·상의원·전설사·전연사·내수사 등에 속한 제거(정3품)·제검(정4품)·별좌(정5품)·별제(정6품)·별검(정8품)은 무록관이었다. 이렇듯 조선이 국가 차원에서 부정·부패를 묵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록관에게 베풀 수 있는 효과적인 자구책이었기 때문이다. 녹봉을 받는 녹관(祿官)도 다음 2가지로 구분되었다.

 

체아

 

체아직(遞兒職)복무기간 동안에만 녹봉을 받는 관직으로, 수시로 진행되는 근무평정에 따라 교체되는 일종의 계약직이다. 체아의 훈(訓)은 「아나」로서, 관직·녹봉이 "아나 이것 받아라"는 식으로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일을 시킨 뒤 일한 만큼만 받아라는 것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문무관직 총 5,605개 중에서 정직은 2,495개(문관직 1,779개, 무관직 716개)였다. 만약 정직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나머지 체아직 3,110개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대표적인 궁궐 계약직, 별감

 

(掖, 겨드랑이·끼다)이 사용된 액문(掖門)은 「궁중의 작은 문」을 의미하는데, 궁궐 정문 옆의 작은 문이 마치 겨드랑이와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 액정(掖庭)은 「액문 안에 있는 뜰」을 의미하다. 조선시대 액정서(掖庭署)는 내시부의 잡직관서로, 내시·궁녀·별감이 소속되어 있었다.

 

tvN 드라마 「철인왕후」에서는 철종(김정현 분)의 각별한 친분을 가진 홍별감(이재원 분)이 등장했는데, 아마 대전별감이었을 것이다. 별감(別監)시위(경호), 왕명전달, 알현안내, 문방구, 궐문열쇠 관리, 궁궐설비 점검 등을 담당하는 체아직이었는데, 관직(품계)이 아닌 잡직임에도 궁중행사에 관여하였기에 큰 권세(특히 금권)를 누렸다. 왕의 가마 옆에서 화려한 복식을 갖춘다. 평상시에는 직령을 입고 머리에는 초립(草笠)·건(巾)을 썼으나, 시위업무 중에는 예복과 직령·단령·철릭을 갖췄다.

별감의 모습 [출처:전통문화포털]

별감은 직책·소속에 따라 아래와 같이 다양하게 불렸다.

 

대전별감 : 임금 보필

중궁전별감

동궁별감

후궁처소별감

세손궁별감

무수리간(無水利間)별감

점마(點馬)별감 : 사복시 근무

내직(內直)별감 : 다방별감·사준별감, 다방

가무(歌舞)별감 : 화초(花草)별감

 

다방(茶房)궁궐에 필요한 채소·약초·꽃·술·과일 등을 재배·공급하는 관아로, 훗날 다방은 내직원(內直院)에서 사준원(司樽院)으로 개칭되었다. 다모(茶母)궁중다방 소속이 아닌 일반관사에서 차·술을 대접하는 잡일을 맡던 관비를 말하는데, 숙종대 포도청 산하에서 운영된 다모는 규방(閨房, 안주인이 거처하는 방)에 투입되어 사대부를 은밀히 내사·체포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이는 고려시대 궁중다방에서 사대부들에게 차를 올렸던 여자들을 밀정(密偵, 빽빽히 염탐)으로 삼았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MBC 드라마 「다모」에서 장채옥(하지원 분)은 관사에서 차·술을 대접하는 관노비로, 사건현장에 투입되어 활약하는 여성형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궁궐 통행세를 대놓고 챙긴, 내시별감

 

내시별감(內侍別監)궁궐 내에서 근무하는 별감을 통칭으로, 평소에는 일상업무를 수행하다가 임금행차시에는 어가를 시위(侍衛, 임금을 가까이서 호위)했다. 내시별감의 수는 100~150명으로 많은 편이었는데, 모든 궁중행사(종묘제사·문묘참배·왕릉참배 등)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시별감은 계약직(보통 900일, 연장 가능) 형태로 벼슬(종7품~종9품)이 주어졌고, 화려한 적색·황색의 도포와 갓을 착용했다.

 

비록 내시별감은 녹봉이 낮은 체아직이었지만, 궁문통행세 징수를 통해 부가수입을 얻었다고 한다. 지방수령으로 발령받은 관리는 임지로 가기 전에 반드시 임금을 배알해야만 했는데, 이 때 각 궁문을 통과할 때마다 별감에게 통행세를 내야 했다. 이를 궐내행하(闕內行下)라 불렀다. 별감은 각 궁문을 지키는 사령·나장들을 지휘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궁문통과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지방관은 임금을 알현하기 위해 각 궁문·관아를 지날 때마다 거액(60~300냥 가량)의 통행세를 지불해야 했다. 당시 1냥(엽전 100푼)은 쌀 3말의 구매력을 가지고 있었다니, 오늘날 300냥은 1,500만원에 달하는 금액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거둔 궁중통행세는 별감·도사령이 안분했는데, 배분율을 별감의 직급에 비례했다. 도사령(都使令)은 사령(문지기)의 우두머리이다. 내시별감은 이러한 부대수입이 주수입(녹봉)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별감으로부터 궁중통행세를 배분받은 도사령은 절반 가령을 가진 후, 나머지는 하급사령들에게 내렸다.

 

드라나·영화에서 감초 역할로 자주 등장하는 별감(특히 내시별감)이라는 자리는 금권을 가진 위치로, 자리경쟁이 치열했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는 무엇일까. 지방관은 궁문통행세를 임지의 백성들로부터 조달했다는 점이다. 발령과 동시에 임지의 아전은 백성으로부터 거둔 궐내행하 비용을 가지고 상경했다고 한다. 간혹 대기업 내부에서 계열사·하청업체 간의 공급체인 과정에서 별다른 역할 없이 통행세를 물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소비자(가격)로부터 조달한 것이라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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