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까지 모계사회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최근까지 유교적 부계전통에 익숙했던 탓에 긴가민가하곤 한다. 하지만 고대사회의 문란한 성풍속은 친부를 특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모계 중심의 가계구조를 갖게 했을 것이다. 이전 글 <수컷을 곁으로 이끈, 친자확인>에서는 인류는 수컷을 곁에 붙잡아 놓기 위해 발정기를 숨기는 진화를 선택했다고 언급했었다. 하지만 현대의 성윤리까지 다다르기 전까지, 발정기만 숨긴다고 남녀의 성에 대한 인식이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았다.
신라시대 일부일처제·처첩제의 공식적인 구분이 있었음에도, 독특한 성풍습(색공·마복자)이 있었다. 이는 현대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복잡한 족보를 만들어 냈다. 물론 유교가 전래되기 전이라, 여자가 여러 남자들과 정을 통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수 있다. 아직 유교적 이념에 절여져 있는 우리의 사고가 얼마나 편협한 것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소설일지도 모르는, 화랑세기
704년(신라 성덕왕 3)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을 역임했던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세기를 저술했다고 전하는데,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훗날 망실되었다가, 1989년·1995년 두 차례에 걸쳐 박창화가 필사한 판본이 공개되었다. 사실이든 소설이든 신라 역대 풍월주(風月主, 화랑 우두머리)의 전기를 다루고 있고, 역대 32명의 풍월주는 역임 순으로 엮어낸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책이다.
다만 화랑세기에만 등장하는 풍월주라는 표현이 조선시대 들어 등장했다고 하니, 이는 화랑세기에 대한 위서(僞書) 논란의 대표적인 쟁점이다. 그래도 통일신라 이전의 고대국가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보니, 사실 여부를 떠나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내용·단어가 큰 관심을 끌기도 한다.
고도의 정치행위, 색공·마복자
신라시대 색공(色供)은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여자를 바치는 일로, 충성스런 마음으로 국가를 위해 큰 인물을 함께 생산하자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상사에게 성상납하는 부정·문란으로 보는게 맞지만, 당시는 신뢰·생산의 이미지로 포장되어 상당히 영광스런 일로 여겼다고 한다. 아마 사회 고위층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고도의 정치행위였을지도 모른다.
초기의 색공은 지도자가 신임하는 신하에게 자신의 첩을 보내 더 많은 자손을 낳게 하는 것이었다. 신라에는 왕실에 색을 바치는 가문이 별도로 있었는데, 이를 색공지신(色供之臣, 색공을 하는 신하)이라 하였다. 색공지신 가문은 수 많은 왕후·후궁·풍월주를 배출할 만큼, 정치적 위세가 대단했다. 인통(姻統)은 왕비를 배출하던 모계계통으로, 대표적으로 진골정통(眞骨正統)·대원신통(大元神統)이었다. 진덕여왕 이전까지는 왕은 오직 성골(聖骨)에서만 배출되었다. 인통이어야 색공을 올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색공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복자(磨覆子, 배를 마주대고 문질러 낳은 아이)는 임신한 여성은 더 높은 신분의 남성과 동침을 함으로써 아이의 또 다른 아버지로 선택하는 신라시대 풍속이다. 대체로 성골(왕족)·화랑 내에게 한정된 대부(代父)제도로 알려져 있다. 왕의 마복자는 왕의 보호를 받았기에, 미모의 부인들은 간택되기 위해 왕궁 근처를 서성이곤 했다고 한다. 당시 마복자로의 간택은 가문의 영광이었다고 한다.
신라 최고의 색공지신, 위화랑
위화랑(미실 외증조부)은 신라 최고의 색공지신으로, 지소태후(법흥왕 딸, 진흥왕 친모)에게 색공을 바쳤다. 위화랑은 2명의 딸(옥진·금진)과 아들 이화랑(4대 풍월주)을 두었는데, 이화랑도 지소에게 색공을 바쳐 딸(만호태후)를 낳았다. 부자는 한 왕녀에게 몸으로 충성을 바쳤던 것이다. 지소는 삼촌(입종 갈문왕)과 혼인하여 진흥왕을 낳은 진골정통이었는데, 남편 2명과 남편의 신하 4명 사이에서 9명의 자녀를 낳았다.
법흥왕(23대)은 옥진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비대(比臺)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하자, 위화랑은 낮은 신분을 이유로 지소의 아들(진흥왕)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간언했다고 한다. 지소는 충성스런 위화랑이 얼마나 이뻤을까. 이후 지소는 위화랑에게 1대 풍월주 자리를 내렸고, 신라 최고의 색공지신 가문이 되었다. 옥진도 길몽을 꾼 날이면, 영실(옥진 남편)이 아닌 법흥왕에게 색공하여 큰 인물을 보고자 했다. 옥진은 영실과의 사이에서 아들 노리부와 다음 3명의 딸(묘도·사도·흥도)을 낳았다.
묘도(妙道) : 남편 미진부, 딸 미실
사도(思道) : 진흥왕 비(妃), 진지왕 친모
흥도(興道) : 남편 기오공, 딸 지도(진지왕 비(妃), 김용춘 모)
장녀 묘도는 친모 옥진처럼 법흥왕에게 색공했고, 나머지 2명의 딸은 왕비가 되었다. 당시 지소가 전골정통의 수장이었다고 하면, 사도는 대원신통의 수장이었다. 궐 내 옥진궁은 대원신통을 의미했는데, 옥진 3대(옥진-묘도·사도·흥도-미실)은 탁월한 색공지신이었다.
신라 최고의 색공지신, 미실
미실(美室)은 필사본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 책에서는 미실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면서 유전적 우월성을 보여주고 있다.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환하게 밝음은 벽화를 닮았고, 빼어난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았다
(容皃絶妙豊厚似玉珍 亮明似碧花 美妙似吾道)
옥진 : 외할머니
벽화 : 할머니의 어머니
오도 : 외할머니의 어머니
미진부(미실 부, 2대 풍월주)는 삼엽공주(법흥왕 소생)의 아들로, 미실은 법흥왕의 손녀뻘이다. 미생(미실 동생, 10대 풍월주)도 용모가 수려하고 말에 운치가 있어, 여자가 많이 따랐다고 한다. 아마 우리가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화랑의 이미지가 미생일지도 모른다. 미실은 이미 익숙한 이름인데,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고현정 분)이 넘볼 수 없는 카리스마와 정치적 수완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신라 3대왕(진흥왕·진지왕·진평왕)에게 몸을 바치면서, 미실은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장악했다. 옥진은 외손녀 미실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며, 진흥왕비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 아이는 우리의 도(道)를 일으킬 만하다
여기서 도(道)는 색공을 말했을 것이다. 옥진은 수려한 미모의 미실에게 미도(媚道, 교태를 부리는 법)·방중술·가무·시가(詩歌)를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미실은 지소태후의 또 다른 아들(세종)의 첩이 된다. 이 때 안타깝게 여긴 외할머니를 보며, 미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첩의 도(道)는 색공에 있는데, 어찌 진흥왕인들 받들지 못하겠습니까?
남다른 가문의 기세를 타고난 미실은 결혼과 함께 색공에 전념할 각오를 한 모양이다. 옥진으로부터의 영재교육을 받은 미실은 침실에서 왠만한 왕·귀족·화랑을 사로 잡았을 것이다. 이렇게 색공에 진심이었던 미실은 다음 삼대에 걸친 성골에게 색을 바치게 된다.
진흥왕(24대)
동륜태자 : 진흥왕 장남
진지왕(25대, 금륜) : 진흥왕 차남
진평왕(26대, 백정) : 동륜태자 아들
세종은 중신 태종(苔宗)와 지소태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태종은 노래「독도는 우리 땅」에서 등장하는 신라 장군 이사부이다. 궐 내에서 지소의 미움을 산 미실은 출궁되었는데, 지소는 대소신통이었던 미실은 처음부터 달갑지 않게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궐 밖에서 미실은 사다함(5대 풍월주)과 사랑을 키워갔는데, 사다함은 혼인 전 미실의 연인이었다. 561년 9월 가야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는 사다함을 위해 미실이 지은 향가가 풍랑가(風浪歌)이다. 하지만 세종이 미실을 잊지 못하자, 지소태후는 다시 미실을 입궐시켰다. 전장에서 돌아온 17세의 사다함은 연인과의 이별과 친구(무관랑)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세종은 이화랑의 추천으로 6대 풍월주가 되었고, 설원랑을 보좌관으로 앉혔다. 동륜(진흥왕·사도 아들)이 장성하면서, 사도는 미실에게 동륜과 가까이 하여 아들을 낳도록 했다. 이렇게 이종사촌(미실·동륜)은 통정을 했다. 문제는 미실이 진흥왕까지 섬기게 되면서, 남다른 음사(陰事)로 황후와 동일한 권위를 갖는 전주(殿主)가 된 것이다. 이후 조정에서 미실이 정사(政事)를 총괄하데 되는데, 미실에게 빠져 살던 진흥왕이 29년 만에 원화(源花) 제도를 부활시키면서 미실을 원화로 삼은 것이다.
당시 미실은 남편 세종을 전장에 내보낸 후, 풍월주 권한을 이어받아 화랑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때 설원랑(남편 보좌관)과 미생랑(미실 친동생)과도 정을 통했다고 한다. 572년(진흥왕 33) 동륜태자가 보명궁주(진흥왕 후궁)를 범하기 위해 보명궁 담장을 넘다가 개에 물려 죽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일로 인해 미실·동륜의 관계도 들통이 났다. 미실은 출궁과 함께 원화에서 물러났고, 세종도 설원랑에게 풍월주를 넘겼다. 궁주(宮主)는 왕궁 내에 독립된 궁을 가진 왕의 후궁이다.
이후 사도의 청으로, 진흥왕은 미실을 입궐시킨다. 진흥왕이 병에 걸리자, 사도·미실은 국정권한을 쥐게 되었다. 576년 진흥왕이 죽자, 사도·미실·미생은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한 채 미실은 금륜(훗날 진지왕, 동륜 동생)와 정을 통했다. 왕후자리를 약속받고 행한 일이었지만, 왕위에 오른 금륜은 약속을 어기고 지도(知道)를 왕후로 맞는다. 사도·미실은 노리부(사도 오빠)를 통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진지왕을 폐위한 후, 백정(훗날 진평왕, 동륜 아들)을 왕으로 추대했다.
사도는 보명·미실에게 진평왕에게 색을 가르치도록 명했다. 골품이 낮은 미실이 색공을 양보했지만, 임신 중이던 보명보다 먼저 색공을 올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색에 눈을 뜬 진평왕은 보명궁에 찾아가서, 임신 중인 보명과도 상통했다. 이렇게 진평왕은 즉위 직후 미실·보명을 각각 우후(右后)·좌후(左后)로 임명했다.
지금은 인정될 수 없는, 색공
지금 시각으로 보면 왕비가 되기 위한 미실의 색공이 비난의 대상이겠지만, 당시 계급체계·색공개념을 알면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다. 오늘날 성적 비위로 법의 심판을 받는 유명 정치인, 교회목사, 이단종교의 교주 등은 자신의 권력에 심취한 나머지, 조직 내에서 은밀히 색공을 가스라이팅하는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아주 원초적이고 신비한 욕망인 점은 인정하지만, 불과 1,500여년이라는 시간 사이에 풍습과 성적 인식이 크게 변해버렸다.
미실은 많은 상대남성들 중에서도 설원랑과의 관계를 가장 진실되게 느꼈으며, 그와의 사이에는 마지막 아들 보종공(16대 풍월주)을 낳았다. 진평왕 중기 미실·세종·설원은 영흥사(永興寺)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606년 미실이 병에 걸리자, 미실을 밤낮으로 간호한 사람은 설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설원도 미실과 유사한 병을 앓고는 죽었다는 것으로 보아, 전염병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흔히 귀공자 이미지의 화랑을 중심으로 풀어 낸 화랑세기가 보여주는 신라 상류층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일 수 있지만, 현대인들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은 우리가 사는 패턴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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