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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서인의 고향, 파주

by Spacewizard 2026.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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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년(선조 8) 이조정랑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심의겸(서인)·김효원(동인)이 충돌은 당쟁의 시작점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중재했다고 알려진 이이는 결국 서인의 종주로 역사에 남았다. 서인의 표면에 이이가 있었다면, 그 뿌리에는 송익필이 있었다. 삼현수간(三賢手簡, 보물 1415호)은 삼현(송익필·성혼·이이)이 주고 받은 서한집으로, 현재 삼성 리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삼현은 젊은 시절부터 주요 사안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이며, 놀라운 점은 삼현과 그들을 후원하던 심의겸(명종비 동생)이 모두 파주에서 살았다는 사실이다.

 

인재가 머무는 마을, 파주

 

송익필(1534년생) : 교하현
성혼(1535년생) : 눌노리
심의겸(1535년생) : 광탄
이이(1536년생) : 율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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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 <오래 전 글로 피어난, 파주>에서 파주라는 지명은 1459년(세조 5) 목(牧)으로 승격되면서 개칭되었다고 언급했었다. 757년 신라(경덕왕)의 점령 이후 교하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 교하현(현 금릉동·교하동)은 공릉천을 따라 형성되었다. 교하(交河, 하천이 만남)는 서쪽의 한강와 동쪽의 임진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들어간다고 하여 붙여졌다. 1535년 성혼은 한성(현 순화동)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 성수침(파산학파)을 따라 눌노리(현 파평면)으로 이사했다. 성혼은 인근의 율곡리에 머물던 이이와 교류가 잦았다. 광탄(廣灘, 넓은 여울)은 양주의 2개면(백석·광적)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문산천에서 합류하면서 큰 여울이 생겼다는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파주 내 위치 [지도:카카오맵]

삼현수간에 따르면, 이이는 성혼·송익필과 모여 살았으면 하여, 웅담리를 방문하여 함께 집터를 보고 왔다고 한다. 하지만 성혼은 임장활동에 흥미를 가지지 못한 모양인지, 땅 보러 다니고 집을 짓는 것이 인생의 낭비라고 여겼다고 한다. 결국 세 사람이 함께 지내는 일은 없었다. 삼현수간(三賢手簡)은 송익필·성혼·이이 간에 왕래한 서신을 후대에 4첩(帖)으로 제작한 것이다. 임진왜란 피난길에서 파주를 지나던 선조가 성혼의 집을 물었는데, 옆에 있던 대신이 한 집을 지목했다. 어찌되었든 성혼은 선조를 알현하지 못했고, 이후 선조는 성혼을 미워했다고도 전해진다. 파산서원(눌노리)은 백인걸·성혼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효종대 사액(賜額, 임금이 현판액자를 하사함)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사원철폐령에서도 살아 남았다.

 

지금의 시각에서는 이이가 막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아래위 10년 정도는 동년배로 간주했다. 파주 출신 동갑내기 4명이 일찍부터 무리지어 조정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서인의 출발점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심의겸(명종 처남, 명종비 심씨 동생)이 있었다. 심의겸은 이황의 문인이었음에도, 이이·성혼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서인이 되었다. 참고로 명종은 조선의 마지막 적통인 임금이었다. 성혼은 천거되어 관직에 나아갔지만, 천출(賤出) 송익필은 과거시험을 치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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