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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과거에 필요한 건, 돈

by Spacewizard 202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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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 초시(初試, 소과)는 식년이 되는 직전해 가을(음력 7~8월경)에 치르졌고, 복시(覆試)는 식년이 되는 해의 봄(음력 2월경)에 치러졌다. 비정기시험(증광시·별시·정시·알성시 등)은 국가의 대사·경사를 기념하거나 왕권을 과시하기 위한 이벤트 성격이 강했기에, 대과 응시자격이 식년시보다 완화되어 적용되었다. 기본적으로 백패(白牌, 소과 합격증서)는 있어야 했는데, 소과(생원·진사시)는 한 번만 합격하면 그 자격이 평생 유효했다. 한 번 김진사는 죽을 때까지 김진사였던 것이다. 소과 합격증 없는 유학(幼學, 관직·합격증이 없는 선비)도 대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있었다. 정시(庭試)·별시(別試)도 국가 경사를 기념하여 정전(궁궐 뜰)에서 치러진 시험으로, 소과 합격 없이도 유학에게 개방된 시험이었다. 도과(道科)는 임금의 지방행차를 기념하여, 해당 지역의 선비를 대상으로 소과 자격과 무관하게 치른 대과였다.

 

알성시(謁聖試)는 왕이 문묘(성균관)에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낸 뒤 즉석에서 치르는 시험으로, 원래는 성균관 유생들만 응시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성균관 마당에 모인 모든 선비를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기도 했는데, 소과 합격도 없이 하루 만에 출세할 수 있는 일종의 로또과거였다. 성균관 학생은 소과 합격 여부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상재생(上齋生) : 소과 합격자

하재생(下齋生) : 소과를 거치지 않은 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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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승보생(四學升補生)은 한성사학에서 성균관으로 월반(조기입학)시킨 성적우수자로, 대표적인 하재생이다. 지방향교에서도 도지사가 추천한 성적우수자가 하재생으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고, 음서의 연장으로 고위관료의 자제가 하재생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유생들은 매일 조석으로 식당에 출석하여 도장을 찍어야 원점(대과응시 자격점수)를 얻을 수 있었는데, 상재생이 하재생에 앞서 식당에 입장했다. 성균관 캠퍼스에서는 상재생이 하재생을 통제하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소과를 합격한 영호남 선비들은 짚신을 신고 초봄 갓 녹기 시작한 축축한 땅을 밟고 한성으로 향했을 것이다. 소과는 지역(전국 8도)별 인구비례로 합격정원이 정해져 있었는데, 전국 330여개 고을(군·현)에서 대략 5명 이하의 선비만이 대과를 위해 한성으로 향했을 것이다. 흔히 홀로 외롭게 상경하는 선비를 떠올릴 수 있지만, 고을 차원에서 상경단(짐꾼·노비 등)을 꾸렸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영호남에서 서울까지는 도보로 6~8일 정도 걸릴텐데, 조선시대에는 20~30일이 소요되었다. 약 3배 정도이 시간이 더 걸린 것인데, 험준한 산길, 큰 강, 하루 2~3켤레씩 필요한 짚신, 무거운 괴나리봇짐(종이·먹·붓·쌀·의복 등)이 이동속도를 더디게 했다. 한성에 도착하여 바로 시험을 봐야 했기에, 짬짬이 공부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하루 약 20~25km(5~6시간)를 걸으면서 체력을 안배했을 것이다.

 

1,000리(400km) 거리의 한양까지 왕복하는 비용은 현재가치로 1,000만원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는 <양반가문을 향한 투자자본>이었다. 당시 1냥(쌀값 기준)의 가치가 현재의 7만원 상당이었다고 하는데, 지방선비들은 집재산을 담보로 대과에 도전해야 했다.  숙종대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전면 통용되었는데, 화폐의 기본단위는 다음과 같았다.

 

양(兩, 냥) : 10전

전(錢, 돈) : 10문

문(文, 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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