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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토사구팽된 천재, 허균

by Spacewizard 2026.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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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서는 허균이 천지간괴물(天地間怪物)로 기록되고 있는데, 당시 권력층의 시각에서 허균의 천재적 머리와 글재주로 권모술수를 부리는 모습이 상당히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1618년 허균은 처형장(역모 혐의)으로 끌려가기 전에 다음과 같이 외쳤지만, 말할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할 말이 있다!
欲有所言

 

허균의 사형(능지처참) 처리는 사법절차(왕의 심문, 고문, 죄인의 서명)을 무시하면서 신속히 처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판결문(이나 자백서류)에 죄인이 직접 수결하는 제도가 있었다. 허균의 죽음을 이이첨의 토사구팽으로 보기도 하는데, 정치적 목적(폐모론 등)에 지저분하게 이용한 뒤 위협요인이 되자 버린 것이다. 허균은 체포 직전에 딸·사위에게 다음의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다면 그 덕에 지금 허균과 허난설헌의 작품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내 누이(허난설헌)의 글을 챙겨 훗날을 도모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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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이이첨의 관계는 오랜 시간 공생이었다. 이이첨(1560년생)은 허균(1569년생)보다 9살이 많았으나, 둘은 과거를 준비하던 시절부터 한성의 한 글방동문이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피난을 떠났던 선조는 1593년 10월에야 한성으로 돌아왔고, 1594년 2월 정시를 개최했다. 정시(庭試)는 임금이 참관하는 가운데 궁궐마당에서 치러지는 시험으로, 초시·복시 없이 1번의 시험으로 등ㅇ수를 가린다. 별시(別試)도 정시와 비슷한 특별시험으로, 임금이 직접 참관하지는 않는다. 

 

1594년 26세의 허균은 정시에서 총 13명 합격자 중 3등(을과 2등)로 급제했고, 그 해 별시에서 이이첨도 을과로 급제했다. 사실 소과에 합격한 이이첨은 광릉(光陵, 세조의 묘) 참봉를 지내면서, 목숨을 걸고 어진·위패를 지킨 공로로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후 1597년 허균은 현직관료를 대상을 하는 중시(重試)에서는 갑과 1등(장원급제)를 차지했는데, 당시 합격자는 5명이었다. 1608년(광화문 즉위) 이이첨은 중시에서 장원급제하게 되는데, 세자가 왕이 된 해에 세자시강원 사서(스승)가 1등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인지상정이다. 광해군대 이이첨은 명실상부 대북파의 수장이었다. 

 

1613년 허균은 자신의 제자와 친한 친구들이 대거 연루된 역모사건(칠서지옥)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이 때 이이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이첨은 허균의 뛰어난 문장력과 외교적 재능을 높이 샀기에 정치적 동지로 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허균은 권력을 다지기 위해 이이첨보다 더 과격하고 정치적인 폐모론(인목대비)를 주장했고, 결국 1618년(광해군 10) 1월 인목대비가 폐위되었다. 허균은 폐모론 여론을 이끈 공로로 좌참찬(정2품)에 올랐고, 이이첨은 허균의 승승장구가 부담되었을 것이다. 당시 세자빈(이이첨 외손녀)이 아들은 낳지 못하고 있었는데, 허균의 딸이 세자의 후궁(소훈)으로 간택되는 과정이 진행 중이었다. 이이첨의 분노와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인목대비 폐위 직후 기준격(기자헌 아들)은 폐모론을 반대했던 기자헌(영의정)을 구하기 위해 허균의 저격(역모 혐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던 시점, 마치 조작이나 한듯 남대문에 광해군을 비방하는 벽서가 붙게 된다. 벽서사건의 배후로 허균 측근이 지목되면서, 의금부는 허균은 투옥시켰다. 이이첨이 허균을 외면하면서 철저히 처형을 주장했는데, 국문 과정에서 함께 모의했던 정치공작이 폭로될까봐 두려웠을 것이다. 이이첨은 허균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기 전에 신속히 처형시켜야 했다. 아이러니하게 딸이 입궐하는 시점에 허균은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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