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7월 한창 더운 날, 고려왕조는 475년의 역사를 뒤로 했다. 조선이 개국하기 전 몇일 동안을 숙청과 명분쌓기가 이어졌고, 고려왕실을 지지하던 마지막 온건파 사대부(우현보·이색·설장수 등)은 유배에 처하거나 유배지를 옮겼다. 이성계 세력은 개경 시내와 조정에서 정변을 위한 명분(천명이 이성계에게 기울었다는 여론)을 형성했을 것이다. 조선 개국 하루 전인 7월 16일, 이성계 세력은 공양왕을 압박하여 왕대비(정비 안씨, 공민왕 4비)의 교지를 내리게 했는데, 교지의 내용은 유약한 왕에게 정치를 맡길 수 없으니 폐위한다는 내용이었다. 고려의 국새는 왕대비 전으로 회수되었고, 조정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말 그대로 폭풍전야와 같은 조용한 하루가 아니었을까 싶은데, 백관들은 이성계의 사저로 몰려가거나 두문불출한 채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 봤을 것이다.
고양군으로 강등된 공양왕은 원주로 유배길에 올랐는데, 궁을 떠나기 전에 이성계의 사저를 향해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을 간청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개경에서 유언비어(왕씨 복위)가 돌자, 조선 조정은 공양군을 간성(현 고성)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최종적으로는 궁촌리(삼척)으로 이배시켰다. 조선 개국기 조선 전역에 숨어 살던 왕씨 종친은 배를 타고 강화도·거제도로 이동하던 중 앞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하는데, 무덤을 남기지 않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었다. 1394년(태조 3) 4월 조정은 정남진(중추원사)과 함부림(형조전서)을 삼척으로 보내, 50세의 공양왕과 그의 두 아들을 교살(목 졸라 죽임)했다. 1416년(태종 16) 태종은 지나친 살상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공양왕(恭讓王)으로 공식추봉했고, 고릉(공양왕 무덤)은 2군데(경기도 고양, 강원도 삼척)에 존재한다.
공양왕이 폐위된 다음 날인 7월 17일 아침, 대소신료(배극렴·남은 등)과 군사들은 정비 안씨로 부터 건네 받은 국새를 들고 이성계의 사저로 찾아 갔다. 하지만 이성계은 문을 닫은 채로 여러 번 사양했는데, 이는 유교적 선양을 위한 연출이었다. 결국 즉위를 수용한 이성계는 신하의 호위를 받으면서 수창궁(壽昌宮)으로 향했다. 이성계는 임금의 정전이 아닌, 궁문 골목의 백관들이 늘어서는 자리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이 또한 조심스런 태도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즉위교서를 발표하면서, 고려의 고사(故事)를 그대로 따르도록 지시했다. 이는 민심의 동요를 막고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신중한 조치였다.
이후 이성계는 사저에 머물면서, 수창궁으로 출퇴근을 했다. 정세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7월 19일 조정은 한상질을 명나라로 보냈는데, 새 왕조의 탄생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당시 권서고려국사(權署高麗國事)라는 직인을 사용했는데, 이는 왕의 칭호를 정식으로 얻기 전까지 임시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였다. 방어적인 외교전략을 펼쳤다. 7월 20일 전후로 논공행상을 위한 개국공신을 책봉하는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을까 싶다. 개국공신에게 토지와 노비가 지급하면서, 조정의 권력을 이성계 친위세력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건국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정책이 펼쳤는데, 기존의 가혹한 세금을 감면하고 억울하게 노비된 자를 풀어줬다.
조선개국 직후인 1392년 8월, 정비 안씨는 의화궁주(義和宮主)로 강등되었다. 하지만 명칭의 변화였을 뿐,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어른 대우를 받았다. 고려를 통째로 넘긴 의화궁주는 80세에 사망하기 까지 술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고뇌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은 의화궁주의 장례를 중국고사에 따라 고려왕비의 예로 성대하게 치러줬는데, 주나라가 수나라 왕비를 예우했던 전례를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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