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라면의 전성시대로 기억되는데, 신라면(농심)과 도시락컵라면(팔도)이 처음 출시된 해이다. 당시 국민학생이었지만, 매운 이미지를 앞세운 신라면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몇몇은 전력질주를 하면서 정문을 향해 뛰어 나갔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팔도 도시락을 사먹기 위해서였는데, 친구가 부어주던 소량의 라면국물에 말아 먹었던 밥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근데 요즘 라면에서는 그 당시의 맛이 상실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인생에서 처음 접한 자극적인 음식으로 인한 기억의 편향일수도 있고, 조리환경(연탈불·냄비 등)에 따른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라면은 정말 맛있었다.
당시와 맛의 차이가 나는 또 다른 음식이 있는데, 바로 중화요리(짜장면·볶음밥)이다. 당시 중화요리에 들어가는 돼지고기의 고소함과 바삭함부터가 지금과는 달랐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맛 차이가 유지(油脂, 기름)의 변화에서 왔다고 얘기한다.
동물성 기름에 대한 오해, 우지파동
1989년 삼양라면의 <우지파동>이 있었는데, 라면을 공업용 쇠기름(소기름)에 튀겼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시기상으로 미국에서 권장된 고탄저지의 식단이 전세계로 보급된지 10년 가량된 시점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가뜩이나 식이지방이 비만의 원흉으로 타겟팅된 상황에서, 기름 중에서도 동물성 기름은 가까이 해서는 안될 존재로 변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시 수입업자들이 세금을 줄이기 위해 수입산 우지·돈지를 공업용으로 신고한 후, 식용으로 사용하던 관행이 있었다. 실제 삼양라면에는 식물성 기름보다 등급이 더 높은 동물성 기름을 사용되었지만, 대중의 왜곡된 인식에서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우지파동이 일어난 지 7년이 지난 1996년, 일부 중화요리집에서는 비계 이외의 부분에서 추출한 돈지를 조리에 사용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가죽·내장·뼈와 부속(간·콩팥·허파)에서 돈지를 추출했다고 한다. 동물성기름과 관련된 일련의 사태로 인해, 동물성기름은 순식간에 식물성기름에 밀리게 된다. 식품제조업·요식업 사업자 입장에서도 비용 측면에서 굳이 비싼 라드를 쓸 이유도 없어졌으니, 어찌보면 소비자들만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이전 글 <수난 겪는 마법가루, 대체당>에서도 사카린이 24년 만에 안전물질로 인정되었지만, 인지부조화·확증편향으로 인해 사람의 인식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언급했었다.
건강하고 맛있는, 돼지기름
라드(lard)는 비계에서 돈지(豚脂, 돼지기름)를 정제하여 만든 기름으로, 다양한 요리·제과·제빵에 사용된다. 영양·맛이 우수한 라드는 생각보다 비싼 편이며, 중국·일본·서양에서도 월병·라멘·스프의 향미·풍미를 돋구기 위해 라드를 사용한다. 심지어 빵에 발라먹는 라드스프레드가 있을 정도이며, 일본라멘에는 비계가 붙은 삼겹살 차슈(叉燒)가 들어간다. 올리브유(식물성)와 라드(동물성)는 단일불포화지방산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 혈관건강을 개선시켜 준다. 라드는 체온 수준의 온도에서 액체(불포화)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타 동물성지방(양고기·쇠고기)보다 불포화지수가 높다.
대표적인 기름의 불포화지방 비중은 다음과 같다
라드 : 불포화지방 60% 가량
오메가9(올레익산) : 50%
오메가6(리놀레닉산) : 9%
오메가3(알파리놀레닉산) : 1%
라드(동물성)은 식물성(올리브유·아보카도오일)과 유사한 성분구성이며, 발연점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발암위험이 낮다. 라드는 비타민B·D, 미네랄 및 콜린을 함유하고 있다. 콜린의 부족은 심장병·치매·간에 문제를 일으키는데, 콜린이 인지능력(주의력 ·기억력)을 향상을 시킨다. 최근 다이어트 음식으로 돼지껍데기 과자가 소개된 적이 있다. 순수지방일 것 같은 돼지껍데기는 생각보다 저탄고단(저탄수화물·고단백질)의 저칼로리 식품이라고 한다. 피부·관절에 도움을 주는 풍부한 콜라겐은 덤이다. 라드에는 트랜스지방이 거의 없으며, 동물성 기름이라도 함유된 콜레스테롤이 버터의 절반 이하이다.
비싼 동물성 기름을 대체한, 경화유
이전 글 <포화와 불포화의 영역, 기름>에서 트랜스지방이 산업형으로 발전된 계기를 언급했었다.

비싼 동물성 기름인 버터·라드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각각 마가린·쇼트닝인데, 모두 트랜스지방을 함유한 부분경화유로 만들기 시작했다. 버터는 우유에서 4% 미만으로 추출되는 유지방으로 만드는 천연유지이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비싸다. 1869년 나폴레옹 3세는 전투 중에도 변질되지 않는 버터대체품 개발을 공모했고, 이폴리트 메주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가 우지·우유를 섞은 물질을 만들었다. 당시 제품명이었던 올레오마가린(Oleomargarine)이 현재의 마가린(margarine)이 되었다. 당시 동물성(우지·고래기름·생선기름 등)을 이용하여 마가린을 만들었지만, 현재는 주로 식물성(대두유·코코넛유·팜유 등)를 원료로 한다. 1813년 미셸 외젠 슈브륄(Michel Eugène Chevreul)이 동물지방에서 새로운 지방산을 발견했는데, 굳을 때 진주처럼 영롱하고 하얀 빛깔을 띠어 그리스어 마르가리테스(margarites, 진주)라 명명했다.
18세기 숏도우(short dough, 짧게 끊어지는 반죽)에 첨가되는 지방을 쇼트닝·쇼팅(shortening, 부서지기 쉬운)이라 불렀다. 밀가루의 글루텐 분자 사이의 교차결합을 지방이 방해하면서, 부서지기 쉬운 질감이 생기게 된다. 과거 동물성·식물성 모두를 쇼트닝으로 분류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식물성 고체지방만을 주로 지칭한다. 대부분의 쇼트닝은 최저 단가의 팜유로 만들어지는데, 20세기 초 프록터앤겜블(P&G, 미국 식품기업)에서 크리스코(Crisco)를 출시하면서 쇼트닝이 대중화되었다.
마가린·쇼트닝의 차이는 수분의 양에 있다. 마가린은 수분이 15% 들어있는 유화물인 반면, 쇼트닝은 지방 100%이다. 수분이 전혀 없는 쇼트닝은 과자·튀김과 빵·케이크를 더 바삭하고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홈베이킹에서는 몸에 좋은 버터를 사용하지만, 대량으로 생산하는 일반제과점에서는 주로 저렴한 마가린·쇼트닝을 사용한다. 마가린은 딱딱할수록 트랜스지방의 함량이 높다. 길거리 토스트가게에서 쓰이는 딱딱한 마가린은 고소한 향을 풍기지만, 건강에는 딱히 좋지 않다. 쉽게 녹는 마가린은 냉장보관이 필요하며, 상온에서도 고형을 유지하는 쇼트닝은 실온보관이 가능하다.
1980∼1990년대 우지·돈지 파동을 겪은 후 가장 아쉬운 부분은, 중화요리집에서 라드 대신 식물성기름(대두유 등)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물론 어디에선가는 라드로 볶은 밥·돼지고기를 사용하고 있겠지만. 2007년 12월 국내 가공식품의 영양표시에 트랜스지방을 표기하게 되면서, 현재 시판되는 대부분의 과자류는 트랜스지방이 없다고 표시되고 있다. 식품업계에서도 부분경화유가 아닌 다른 유지를 개발하여 트랜스지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경화유를 완전대체하지 않는 한 트랜스지방은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식이유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것은 편견이 아닌 올바른 지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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