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도성은 10만명 규모를 전제로 축조되었지만, 17~18세기 동안 한성인구는 30만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대동법 시행 이후 한성은 권력 뿐만 아니라 돈·정보가 집중되었고, 모든 계층의 백성들이 기회를 찾아서 한성으로 몰려 들었다. 이는 마치 1960~70년대(산업화시대)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했던 형국과 유사하다. 세금을 통일된 매개(쌀·동전·옷감)으로 걷기 시작하자, 궁궐·관청에 필요물품을 대량으로 조달하는 독점상인이 등장했다. 이 공인(貢人)이 거대자본을 굴리면서, 한성은 경제도시가 되었다. 여기에는 사상(私商, 개인상인)의 급성장의 기여도 있었다. 기존 시전상인의 독점권에 도전하는 사상들이 한강변(마포·서강 등)이나 도성안(안현·칠패 등)에 자리 잡았다. 번화가에는 숙박시설(주막·객주·여각)과 유흥가(판소리·잡가 등)이 발달했다.
신분구조가 흔들리는 과정에서, 상민·노비가 대거 양반신분을 획득하면서 양반의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증가했다. 왜호양란 이후 파탄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조정은 돈으로 신분(납속책)과 관직(공명첩)을 거래했다. 부농·상인은 양반족보를 매입(내지 위조)할 수 있었는데, 가장 큰 인센티브는 세금(군역면제)이었다.
자본의 집중과 신분제 붕괴로 한성 내 집값은 계속 우상향했을 것이다. 한정된 도시면적에 인구가 증가하면, 주거형태가 수직적으로 확장해야 한다. 하지만 한성은 수평적으로만 확장하면서 주거밀도를 높였는데, 수급 측면에서 한성의 집값은 급등할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지방 집값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을테니, 2020년대 들어 서울아파트 가격이 지방아파트 가격과의 격차를 벌려가는 모습이 이와 유사할까. 예나 지금이나 노동소득으로 수도에 내집마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선시대 내내 한성 내 기와집은 함부로 소유할 수 있는 재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흔히 고위급 양반이 으리으리한 기와집을 보유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돈이 많은 거상·통역관의 몫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양반·상경관료는 내집 소유는 커녕 셋방(초가·행랑·문간방·관청 등)을 전전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수입이 없는 양반들은 집세가 밀리는 일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18세기 이후 한성에는 부동산(집·토지 등) 흥정을 중재하고 수수료를 받는 중개인이 등장했는데, 이를 집주름(집주릅)·가거간·가쾌라 불렀다. 고려시대 이후 위탁매매를 영위하던 객주(객상주인)는 그 아래에 거간(居間, 거래중개인)을 두고 있었는데, 주로 집을 흥정하는 직업을 가거간이라 불렀다. 쾌(儈, 거간)를 붙이기도 했다. 조선 후기 한성에만 500명 가량의 가쾌가 운영되었는데, 가쾌는 집값을 부풀리고 거래를 독점하는 폐단이 많았다고 한다. 가쾌가 영업하던 공간을 복덕방(福德房, 사람에게 복과 덕을 나눠주는 공간)이라 불렀는데, 집을 매매하거나 이사하면 복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생겨났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동네 복덕방은 노인들이 소일(바둑·장기)하면서 집을 소개하는 이미지로 변모했다. 복덕방 간판 아래에는 여러 갈래로 가른 누런 삼베를 달려 있었는데, 다음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누런 삼베 : 복이 잘 붙고 오래 간다
갈래 : 출입이 쉬워서 누구나 오기 좋다
현대에 들어 공인중개사 제도가 도입되면서, 부동산중개업소(내지 공인중개사사무소)라는 표현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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