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도 인연이 있을지 모른다. 도심을 산책하다 보면 이유없이 특정 땅 위에서 서 있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과거의 인연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이전 글 <병원하면 떠오르던, 청량리>에서 언급했던 답십리굴다리지하보도도 마찬가지다. 막 상경하여 인상 깊었던 공간을 매번 궁금해 하던 와중에, 10년이 지난 후 매입한 아파트 인근에 굴다리가 있었다.
제대·복학 후 1년 반 동안 대학기숙사 5층에서 살았었는데, 이 때 창가 위로 거대한 고가도로가 있었다. 운전경험이 없던 지방 출신이 그 도로명(내부순환도로)을 알게 된 것은 5~6년이 지난 후였지만, 나도 언젠가는 저 도로 위를 운전하고 있겠지라는 생각에 빠지곤 했었다. 그런 생각을 한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내부순환도로를 줄기차게 탔었다. 신혼집과 그 다음 집이 내부순환도로를 이용하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2003년 한 교양수업의 과제 중에 남한산성 투어가 있었는데, 당시 이용했던 지하철역(5호천 마천역, 8호선 복정역)만은 기억에 남았다. 학교 근처에서 5호선을 타고 종점(마천역)에서 내린 후, 남한산성 서문을 향해 올라 갔다. 당시 산기슭까지 이어진 길의 오른편에는 군부대 담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과 달리 좁고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수어장대에서 내려다 본 아래는 가락동까지 거의 녹색지대에 가까웠고, 산성 바로 아래로는 군부대·골프장이 있었다. 2013년 우연치 않게 산성 아래의 동네를 방문했었고, 2017년부터는 남한산성 아래 동네에 살고 있다. 40대 중반이 되다 보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어 온 행동·생각·기억이 연결되어 있지 않나는 생각이 든다. 인생에서 우연이 없다는 말도 있지 않나.
우연은 없는, 인연
불교에서는 인생에 우연은 없으며, 오직 인연만 있다고 말한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은 모든 일(성공)이나 인연에는 때가 있어서, 그 때가 되어야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불교의 인연관을 말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은 우연이 아닌, 과거의 인연에 의해 만난다. 부모·부부·자식·형제자매는 매우 깊은 인연이 작용하는데, 특히 인생의 절반 이상을 같이 하는 부부의 인연은 깊은 업이 자리한다. 현생에서 부부는 은혜를 갚으러 오거나 원수를 갚으러 오는 경우가 많다. 자식은 전생의 빚을 받으러 온 원수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부모가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헌신을 보이는 것일 수 있다.
현생에서 만나는 사람은 업(내지 복)의 결과이며, 인위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만남과 헤어짐을 원망하지 말아야 하며, 불행마저도 받아 들이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현생에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난다는 것은 전생에 복이 많다고 생각하면 된다. 현생에서의 현상과 과거 업의 결과이지만, 현생에서의 업은 또 지나갈 다음 생에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현생에서 누군가의 원한을 사면, 다음 생에서 불행의 결과을 맛 볼 수 있다. 현생의 생명체들은 얼마나 복잡한 윤회의 틀에서 살고 있을까. 돼지를 쫒던 한 사냥꾼이 스님의 말을 듣고 윤회·인연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져 뱀의 머리 부서졌고,
죽은 뱀은 돼지로 태어나 돌을 굴려 꿩(까마귀 환생)을 죽였고,
죽은 꿩은 사냥꾼으로 태어나 돼지를 잡으려 함이로다
악연이 계속 이어짐을 깨달은 사냥꾼은 더 이상의 살상을 거두고,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든 현생까지 이어진 악연의 고리를 끊고, 좋은 인연으로 전환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행과 용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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