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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사 기질의 금수저, 이병철

by Spacewizard 2025.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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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삼성전자가 SK하이닉스에게 밀렸다던지, 이재용의 리더쉽이 한계에 왔다는 말은 많다. 이건희는 항상 위기라고 강조해왔지만, 그의 타계 이후 삼성그룹는 진짜 위기가 엄습하고 있다. 위기의 중심에는 이재용(삼성전자 회장)의 사법리스크가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이재용이 의탁하고 있는 경영임원진들의 역량이다. 하긴 대기업 내에서 오너를 대신해서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릴 경영자가 있을까. 더군다나 국내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 1위라서 보는 눈도 많다.

 

2025년 2월 이재용이 부당승계 의혹 항소심(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사법리스크에서는 거의 벗어난 모양새다. 물론 검찰은 상고를 했지만. 이재용은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된 바 있는데, 이 때의 경험을 통해 이재용의 리스크가 삼성그룹 전체의 리스크라는 공식은 확인된 바 있다. 이재용 입장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국정농단의 여파로 미래전략실이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이재용은 법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룹 컨트럴타워라도 있었다면 삼성전자가 이렇게까지 넋 놓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부에서는 미래전략실을 색안경 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삼성그룹 규모의 대규모기업집단을 통제하면서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몇 달 후 사법리스크가 완전히 걷히는 시점에서 이재용은 다시 리더쉽 평가대에 오를 것이나, 그 때 가서 준비하면 당연히 늦다. 개인적으로는 이재용이 수 많은 현안들을 신속·과감한 결단으로 헤쳐나가면서, 우유부단한 이미지를 쇄신했으면 한다. 이래나 저래나 사업가의 성패는 에 달렸으니, 짧은 시간 내에 충분히 고민한 후 저지르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80~90년 전 할아버지(이병철)의 인생에서 엿보였던 승부사적 DNA가 이재용에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경성사람 못지 않은 시골사람, 이병철

 

병철은 이찬우(1874년생)의 차남(막내)으로 태어나, 첫 사업을 일군 도시가 마산이었다. 당시 이찬우는 경남 의령의 천석꾼으로, 청년시절 한성을 오가며 독립협회·기독교청년회에서 이승만과 만난 인연이 있었다. 이찬우의 처가도 경성 가회동이었다. 이병철은 5살때부터 조부가 세운 서당(문산정)에서 한문을 익혔고, 1922년 3월 13세의 나이에 지수공립보통학교(진주면) 3학년으로 편입했다. 지수공립보통학교는 시골학교임에도 이병철·구인회·허준구를 배출했다. 1922년 9월 이병철은 외가 인근의 송공립보통학교(경성 종로)로 전학했다. 이전 글 <조선 2인자의 픽, 정도전 집터>에서는 정도전 집터의 서당자리에 중학을 거쳐 1922년 수송공립보통학교가 신축개교했다고 언급했었다.

 

1925년 4월 중동학교(훗날 중동중-중동고) 속성과에 입학했는데, 속성과보통학교를 속성으로 졸업하고 중등과정을 시작하는 당시의 학제였다. 당시 중동학교는 고등보통학교에 준하는 교육기관으로 중학학력을 인정받았다. 이전 글 <조선인 엘리트의 산실, 고보>에서 고보는 초등교육을 마친 조선인들이 진학하는 중등교육기관으로 1938년 일본의 중등교육기관과 같이 중학교로 명칭을 통일했다고 언급했었다. 1929년 20세의 이병철은 부친이 고른 신부(박두을, 박팽년 후손)과 고향에서 혼인을 치른 후, 다시 상경하여 학업에 열중했다고 한다.

 

중동학교 재학 중이던 이병철은 일본유학을 생각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옆 동네에 살던 4살 연상의 조홍제(효성그룹 창업주)에게 유학경비 500원을 빌렸다고 한다. 함안 출신의 조홍제는 어려서부터 이병철 형제와 교유하던 사이였다. 이렇게 1930년 4월 이병철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했는데, 일본에서 전문부는 대학 내에 설치한 전문학교(專門學校, 고등학교 과정)였다. 당시 일본의 대학에는 전문학교 과정이 부설된 경우가 많았고, 조선인들도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전문부로 진학하기도 했다. 조선 내의 전문학교(연전·보전 등)을 마친 후에는 일본 대학과정으로 진학하게 된다.

 

무위 끝의 뒤늦은, 각성

 

일본으로 간 이병철은 이듬해 1931년 각기병으로 인해 자퇴·귀국한다. 이렇게 이병철은 4개의 학교에서 수학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졸업은 하지 못했다. 고향에서 기력을 회복한 후, 무료한 시골생활을 피해 상경하여 2년 동안 무위의 서울생활을 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카페나 술집(명월관 등)을 출입하면서 심신이 지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고향에 와서도 친구들과 밤새 노름(골패)을 즐기며 무위도식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1934년 어느 날 밤 늦게 귀가한 후 곤히 잠들어 있는 3명의 자식들을 보면서, 25세의 이병철은 지난 날의 후회와 함께 뜻을 세워야 한다는 각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부친으로부터 답(논) 300석분을 증여받아 사업자금 1만원을 마련했다. 이병철이 새로운 도전에서 성공했던 배경에는 아버지의 격려·후원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는데, 젊은 시절 넉넉한 생활비와 재기자금은 헝거리정신과는 또 다른 결의 기업가정신을 낳았다.

 

이병철(1910년생)

박두을(1907년생)

 

인희(1928년생, 이병철 19세) : 한솔그룹(삼남 조동길)

맹희(1931년생, 22세) : CJ그룹(장남 이재현)

창희(1933년생, 24세) : 세한그룹

이숙희(1935년생, 26세) : LG家 출가

이순희(1939년생, 30세)

이덕희(1940년생, 31세) : 이정재家(경남 대지주) 출가

건희(1942년생, 33세) : 삼성그룹(장남 이재용)

명희(1943년생, 34세) : 신세계그룹(장남 정용진)

 

이태휘(1947년생, 38세) : 일본 거주

이혜자(1952년생, 43세) : 일본 거주

 

실리적인 사업계획, 마산행

 

이병철은 사업계획을 세우기 위한 준비과정에서, 사업자금·시장장악력을 고려하여 다음의 생각을 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하면 업종 선택의 폭이 넓고 친구들도 있어 좋지만, 자금이 부족할 것 같아. 대구·부산·평양은 이미 큰 상권을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어 상대가 되지 않을거야. 마산은 고향에서 가깝고 교역량도 딱 적당해... 거래하는 쌀의 규모에 비해 도정을 할 수 있는 곳이 부족하다. 도정료를 미리 내고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정미소가 좋겠군

 

당시 국내 3대 미곡수출항은 군산·목표·마산이었다. 경남 일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특히 쌀)은 마산으로 집하·도정된 후, 마산항을 통해 연 수백만석이 일본으로 보내졌다. 마산항은 만주로부터 대두·수수 등을 수입하고 있었기에, 교육량(수출·입)이 많았다. 1911년 마산에 전기가 처음 들어온 후 도정작업은 전기를 이용한 기계화 정미소에서 이뤄졌는데, 1930년 전후 마산에는 27개 가량의 기계화 정미소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대부분 자본력 있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1937년 손형업이 현재의 남성동에 설립한 흥업정미소는 최초의 법인 정미소였다.

 

1936년 3월 27세의 이병철은 북마산(현 중앙시장 부근)에서 마산 최대 규모의 협동정미소를 창업하였는데, 3명(정현용·박정원 동업)이 각각 1만원씩 출자한 후 식산은행 마산지점(현 남성동 SC제일은행 부지)에서 융자를 얻었다. 초기에는 정미소가 적자를 보면서 한 동업자가 사업을 그만하자고 하였지만, 이병철이 착안한 사업전략(쌀값이 내릴 때는 매수, 쌀값이 올라갈 때는 매도)으로 수익성을 확보했다고 한다.

식산은행 마산지점(현 남성동 SC제일은행) 전경

이전 글 <바다와 산업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마산>에서 1911년 일본은 마산항을 폐항하면서 일본과의 단독무역만 허락했으며, 그 결과 마산은 물자수탈과 일본으로부터의 수입통로가 되었다고 언급했었다. 일제강점기 마산 헌병분견대 남쪽 주거지역에 일본인들이 주로 모여 살았는데, 이병철이 그 지역에 거주했었다는 말을 어렸을 때 들은 적이 있다. 이병철이 마산에 거주했던 1930년대 중후반에는 인근 창포경남아파트부지는 매립이 완료된 상태였다. 이는 이전 글 <오래전 추억 속의 고품격, 성안백화점>에서도 언급했었다.

 

승부사적 기질, 확장본능

 

이병철은 협동정미소를 차린 지 5개월 후인 8월에는 일출자동차(운수업)를 인수하여 트럭 20대(신규구매 10대 포함)로 운수를 시작했다. 이듬해 1937년 이병철을 경남부동산(부동산업)을 설립하여, 사업수익금과 식산은행 대출로 토지를 매매하면서 200만평을 소유하게 되었다. 농토를 담보로 LTV 80%까지 대출이 가능했던 시기였고, 땅을 산 후, 등기·정산하는 사이에 토지감정가가 상승하여 정산금액(에쿼티 차액)을 오히려 돌려받기도 했다고 한다. 오늘날 아파트 투기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100여년 전 토지시장에서 있었나 보다. 허나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런 정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대농 출신의 이병철이 김해평야의 땅을 단기매매로 시세차익을 남기는 거래를 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성향은 3~4년 전 고향에서 즐겼던 노름꾼의 승부사적 기질이 발휘된 것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30세 전후로 파생금융거래를 한참 즐겼던 적이 있는데, 그 느낌이 10대 시절 밤새 도파민 뿜어내면서 즐겼던 화투·포커와 비슷했던 경험이 있다. 이병철이 다음과 같이 회고한 것으로 보아, 젊은 시절 사업 뿐만 아니라 풍류에도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업이 번창하자 근향 동년배의 돈 많고 호탕한 친구들이 많이 생기고 이들과 어울려서 밤마다 호유(豪遊, 호화롭게 놀기)를 일삼았다. 졸부로 어깨가 자못 으쓱해진 나는 젊음의 호기에 이끌리는대로 초저녁부터 요정을 전부 대절해서 노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하루는 마산에 있는 기생과 일본 예기들 70, 80명을 전부 예약해 놓았다. 공교롭게도 그날 경남의 경찰부장이라는 일인이 마산에 왔다. 마산에서는 대단한 상전이라 그를 향응하기 위해 일류요정에 안내하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그 당시 마산에는 일본요정 망월 등 일류요정이 7~8군데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어느 요정에서나 반듯한 기생은 모조리 내가 예약을 해 놓은 다음이었다. 그 때만 해도 남이 미리 예약해놓은 다음에는 아무리 권세가 높은 사람의 요구가 있다 해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유흥가의 불문율로 되어 있었다. 당황한 일본관리들이 나에게 달려와서 자기네의 딱한 사정을 털어놓고는 제발 요리집 한 군데와 기생 서너 명만이라도 양보해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1937년 9월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대출이자의 급등과 함께 대출원금 회수가 실시되었고, 이에 김해땅을 급매하면서 이병철의 토지사업도 막을 내리게 된다. 사업에 있어서 외부변수(흔히 행운)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부분인데, 현 시점에서도 2022년 이후 갑작스런 건축비 인상으로 기라성 같은 시행사·시공사들이 회생신청·부도에 돌입하는 것을 보면서도 많이 느끼게 된다. 암튼 이병철은 공급체인(농사·운수·도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부가가치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전략적·공격적인 경영자의 면모이다.


전쟁으로 본 쓴맛, 그리고 부활

 

다시 부친으로부터 3만원을 지원받은 이병철은 중국여행을 통해 건어물·해산물 시장에 대한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귀국 후 1938년 3월 1일 대구 수동(현 인교동, 서문시장 부근)에 삼성상회(건어류·청과 중국 수출, 제분·제면)를 설립했다. 삼성은 삼(三, 크고 많고 강한 것)과 성(星,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을 합친 것으로,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는 것을 염원이 담겨 있었다. 당시 여느 기업들이 그러하듯 삼성도 삶의 기본요소인 의식주(衣食住) 중에서 먹을 것에 집중했는데, 삼성상회의 히트상품은 별표국수였다.

 

당시 빈민촌에 살던 전상우(전두환 부친)은 삼성상회에서 품팔이를 했는데, 이맹희는 동갑이었던 전두환과 어울리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노태우는 이맹희는 경북중학교 동기이다. 아무리 장남이고 인맥이 좋아도, 비운의 황태자는 

삼성상회 전경 [출처:호암재단]

이병철을 대구지역 부호로 이름 올렸던 상품은 주류였는데, 당시 양조는 허가가 제한된 이권사업이었다. 삼성상회를 개업한 이듬해 1939년 이병철은 일본인 소유의 조선양조장을 10만원에 인수했는데, 경영진 내분으로 인한 급매였기에 헐값에 매수했다. 인수 당시 7,000석의 생산능력(소주·탁주·청주 등)를 1년 만에 10,000석으로 늘렸는데, 이는 중일전쟁 중에 군납할당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왠만한 업종을 침체로 내몰랐지만, 특수호황업종도 있었던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쓴맛을 본 이병철은 결국 전쟁특수로 부활했다. 그리고 마산에서의 성공시대와 마찬가지로 호화로운 풍류를 즐겼다.

 

항상 친구나 양조업자들과 어울려서 요정으로 향하는 일이 잦았다. 돈과 시간을 주체 못하듯 밤마다 새벽 1시가 지나서야 귀가하고 아침에는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일어나는 나태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때는 하루 저녁 요리가 1인당 10원 정도였고, 기생 화대도 한 시간 1원이면 후한 편이었다. 대구의 요정이 싫증이 나면 서울이나 동래 등지로 나들이를 했으며, 그래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일본의 별부(別俯)나 경도(京都) 등지로 원정까지 했다.

 

1세대 재벌총수 중에서도 이병철은 출발점이 앞섰다는 이유로 박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에도 금융문맹이 많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글자 그대로 문맹이 대부분이었다. 토지거래를 위한 융자신청을 위해 식산은행 마산지점에 사업계획·수지표를 제공하는 이병철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자본주의 금융시스템이 막 이 땅에 내려온 시기에 우리 중 누구라도 대자본이 있었다면, 그러지 않을 사람이 있었을까.

 

아버지에게 사업자금으로 토지 300석을 받은 후, 이병철은 5가구의 종에게 땅을 내주고 독립시켰다고 한다. 물론 종문서도 불태움으로써 주위의 시선은 싸늘했을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을 부잣집 도련님의 호기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재물이 많다고 하여 나오는 도량은 아닌 듯하다. 매번 생각해 보지만, 그 시절 이병철보다 돈 많은 마산부호(아니 전국부호)는 많았을텐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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