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주택법에서는 주택으로 쓰는 층수가 5개층 이상인 주택을 <아파트>로 규정하고 있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아파트의 초기형태는 일제강점기에 등장했다. 1930년 미쿠니(三國)상회가 회현동에 일본인 직원을 위한 미쿠니아파트(3층 벽돌구조)를 세웠는데, 국내 최초의 아파트로 평가된다. 이후 1932년 세워진 도요타아파트(4층 콘크리트, 현 충정아파트)는 국내 최초의 임대아파트로, 중앙정원형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1940년 도요타아파트는 수익률 향상을 위해 호텔로 용도를 변경했다가, 해방 후에는 미군숙소용 트레머호텔(Traymore Hotel)로 활용되었다. 한국전쟁 동안에는 인민군 재판소와 미국 CIA 합동고문단 본부로 사용되었다가, 1962년 공매를 통해 주거용(유림아파트)으로 전환되었다. 1980년대 충정로를 따서 충정아파트가 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 미쿠니상회는 경성에 다수의 아파트를 건축했는데, 그 배경에는 석탄수탈로 축척한 거대자본이 있었다. 1932년 17세의 김수근은 미쿠니석탄공사(三國石炭工業) 대구지사의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 갔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수 차례 거절당 한 끝에 사환으로 입사하여 석탄업 경험을 쌓았다. 1947년 김수근은 칠성동(대구)에 대성산업공사(大成産業公司)를 창업했는데, 당시 설비는 수동식 연탄기계 10대였다. 1950년대 후반 김수근은 미쿠니석탄공사 불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1959년 서울에 자회사(대성연탄)를 설립한 후 마장동에 왕십리연탄공장을 세웠다. 연탄공장(현 마장삼성아파트)와 저탄장(현 대성유니드아파트)는 과거 미쿠니석탄공업 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과거 에너지 클러스터였던 마장동에는 대성연탄공장, 한전 내연발전소, 고려가스가 밀집해 있었고, 배후에서 석탄·시멘트 등을 하역하던 공간이 왕십리역이었다.
1935년 미쿠니상회는 내자동 미쿠니아파트(현 서울지방경찰청 부지)와 후암동(구 삼판동) 삼판아파트를 세웠고, 1936년 회현동 취산아파트(현 아일빌딩), 그리고 1939년 적선동 적선하우스를 건설했다. 해방 이후 내자동 미쿠니아파트는 주한미군에 무상대여되면서 미군숙소용 내자호텔로 활용되었는데, 내자호텔 1층 커피숍은 박정희 일행에게 술시중 드는 여인들이 궁정동안가(현 무궁화동산)로 이동하기 전에 대기하던 장소였다고 전해진다. 이 외에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아파트로는 황금아파트(1937년), 청운장아파트(1938년), 국수장아파트(1940년) 등이 있다.
1941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주택영단(朝鮮住宅營團)을 설립하여 영단주택의 공급을 통해 심각한 서민주택난을 해소하고자 하였는데, 영단(營團)은 국가가 통제전시체제 하에서 공공의 목적을 위해 자본을 출자해 만든 경영재단(민관협력 성격)이다. 하지만 실제 영단주택은 일반서민이 아닌 군수산업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공급되었는데, 전쟁을 앞두고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런 의도는 목조형 영단주택에 모르타르(mortar)를 칠한 광경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전쟁 중 도시화재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방도시에 대규모 단지형 영단주택이 공급되었고, 그 중 1942년 세워진 목조형 혜화아파트(3층 규모)가 있다.
해방 후 조선주택영단은 주택난 해소를 위한 존속가치를 인정받아 미군정 감독 하에 있었으며, 1948년 조선주택영단은 대한주택영단으로 개칭되었다. 1962년 대한주택영단은 대한주택공사법에 의거하여 대한주택공사(주공)로 바뀌었고, 2009년에는 주공과 한국토지공사이 통합되면서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되었다.
한국전쟁 후 부유층의 전유물, 아파트
1946년 설립된 중앙산업은 건축자재를 생산하던 회사로, 해방 이후 공동주택의 초기 선례를 남겼다. 창립 10주년을 맞은 중앙산업은 1956년 재일동포직원들을 위한 기숙사용으로 3층 규모의 중앙아파트(주교동, 현 중앙프라자)를 건축했으며, 1969년 그 건너편에 또 다른 6층 규모의 중앙아파트를 세웠다. 중앙산업은 1958년 종암동에 3개동 5층 규모의 종암아파트를 건축하였는데, 이는 세대별로 독립된 소유권을 가진 분양형 공동주택으로써 해방 이후 최초의 아파트로 평가받고 있다.
독일인 마이어가 설계한 종암아파트는 최고급 자재를 사용한 서양구조를 갖췄으며, 준공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은 벽난로를 갖춘 거실, 싱크대, 연탄보일러,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현대식 아파트에 감탄했다고 한다. 대한주택영단은 준공된 종암아파트를 인수하여 일반인에게 불하(분양)하였는데, 단층주거에 익숙했던 당시의 주거관념과 물자(석유·물·전기)낭비라는 인식으로 인해 분양성과는 저조했다고 한다. 1993년 철거된 종암아파트 부지에는 현재 종암선경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파트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된 계기는 북한에 이미 널리 보급된 문화주택(아파트) 때문이었다. 1950년대부터 북한은 농촌에도 유럽식 고층주택(조립식)을 보급했는데, 동유럽에서 필요한 기술·인력을 전수받았다. 북한과의 경쟁구도를 이어가던 박정희는 서둘러 아파트 건립을 독려했고, 이에 대한주택공사는 마포아파트를 준공했다. 마포아파트는 2차례(1962년 1차, 1964년 2차)에 걸쳐 준공된, 국내 최초의 대규모 단지형(10개동 642세대)이었다. 이전 글 <한국인을 호화유람선에서 살게한, 르 코르뷔지에>에서는 마포아파트가 르 코르뷔지에의 위니테 다비타시옹을 그대로 모방했다고 언급했었다.
마포형무소(도화동)의 농장터에 세워진 마포아파트는 초반 입주율이 저조했었는데, 연탄가스 중독위험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당시 연탄가스 누출위험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현장소장이 직접 숙박하기도 했다. 마포아파트는 원래 10층 규모에 고급시설을 갖춘 아파트로 계획되었는데, 당시 석유난방, 수세식 화장실, 엘리베이터, 어린이놀이터, 분수, 조경, 그리고 더스트 슈트(dust chute)는 이전까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컨셉이었다. 하지만 물자낭비라는 비판으로 인해 엘레베이터가 없는 연탄난방의 6층 규모로 변경하여 준공되었다. 1963년말경 마포아파트 대부분은 분양이 완료되었는데, 연탄가스에 대한 두려움이 누그러지고 생활의 편의성이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입주민이 중상류층 위주였기에, 아파트가 부유층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은 1960년대 중반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철거된 마포아파트의 재건축조합이 국내 최초의 재건축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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