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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조선 기생과 일본 접대가 만난, 요정

by Spacewizard 2023.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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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임진왜란 3년 전) 일본 교토는 남초현상으로 노총각이 증가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대책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에 유곽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일본 공창제의 시작이다. 임진왜란을 앞두고 교토의 유곽은 나가사키로 이전되었는데, 이는 전쟁을 앞두고 병사들의 성욕를 해소시켜 사기를 증진시키려는 의도였다. 워낙 많은 꽃과 버드나무가 있는 나가사키의 유곽이 꽃과 나무로 둘러싸인 형색이었는데, 일본인들은 이러한 유곽을 화류계(花柳界)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공인된 유곽에 소속된 오이란(매춘부)는 일본인들의 성적 해방구 역할을 하게 된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에서도 화류계라는 용어가 즐겨 쓰인다.

꽃과 버드나무에서 유래된 화류계
화류계의 유래, 꽃과 버드나무

쿠데타에 기여한, 게이샤

 

17세기 초반 유곽에서 최초의 게이샤(공연가)가 등장하는데, 오이란과 달리 남성이었다. 이후 인기 없는 오이란이 게이샤로 나서면서, 여성게이샤가 남성게이샤를 압도하는 동시에 오이란의 고객들까지 확보하였다. 17세 후반 강력한 중앙집권통치를 등에 업은 조닌(상인계층)이 큰 부를 축적하면서, 성(性)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마땅한 소비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곽은 물론 야설·춘화·가부키가 큰 유행을 했다고 한다. 1779년 막부는 게이샤를 공식적인 직업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매춘행위를 금지시켰다. 이 때부터 게이샤의 인기는 떨어지게 되었지만, 예술인으로 이미지가 승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250년에 걸친 억압적인 쇼군정치에 염증을 느낀 하급 사무라이들은 쿠데타를 계획하게 되는데, 모반을 도모할 비밀회동장소가 필요했다. 가장 적합한 공간이 게이샤 찻집이었는데, 당시 게이샤들은 비밀을 철저히 지키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쇼군통치의 막을 내리는데 있어 게이샤가 기여하면서, 게이샤들의 지위가 높이지는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기생, 공노비

조선시대 공노비는 다음 2가지로 구분된다.

 

선상노비 : 무형의 서비스 제공

납공노비 : 공물납부 의무

 

선상노비 중 하나였던 관기(官妓)는 관청에 소속되어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생으로, 민간기생보다 그 수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 관기와 관비(공노비)가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하는데, 관아에서 임의적으로 관비를 관기로 만들기도 하고, 관기를 다시 관비로 내치기도 했다고 한다. 흔히 관기가 늙거나 병이 들면 다시 관비로 돌렸다. 소설 <춘향전>의 성춘향도 관기였다. 이전 글 <불심과 흥청이 거쳐간 공간, 탑골공원>에서 언급한 연방원에 모은 전국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모아 왕실기생으로 삼았다고 언급했었다.

지역에 따라 기생의 등급이 달리 하기도 했는데, 경기(京妓, 서울기생)와 관기(지방기생)로 구분되었다. 관기 중에서 경기로 차출된 기생을 상기(上妓)라 했다고 한다. 관기가 주로 지역고관의 잔치에서 활약했다면, 경기는 주로 궁중잔치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경기·관기 모두 행사가 자주 있는 편이 아니라서, 주업은 차라리 접대부에 가까웠다고 한다. 기생을 흔히 해어화(解語花, 말을 알아듣는 꽃)라고 불렀는데, 다분히 남성이 여성을 성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급이 낮은 삼패기생(일패·이패에 비해 급이 낮은 하급기생)은 사신·고관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방기(房妓) 노릇을 해야 했는데, 당시 어명으로 지방시찰 중인 봉명사신의 객고를 풀어주기 위해 방기를 두었다고 한다. 19세기 시기(市妓, 민간기생)들이 한양 골목을 장악했으며, 시장터·나루터 근처에서 색주가가 번창했다. 색주가(色酒家)는 들병이(술을 병에 담아 다니며 팔던 매춘여성)들이 모인 선술집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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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요정영업의 시작

요정(料亭)은 기생을 두고 술·요리를 파는 가게를 말하는데, 조선의 기생문화와 일본의 접대문화가 합쳐진 형태였다. 조선시대 진고개(泥峴, 이현)는 명동 중국대사관 뒤쪽에서 세종호텔 뒷길까지 이어진 고개길(현 충무로2가)로, 이 고개는 현재의 중구청에시 시작되어 명보아트홀를 거쳐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남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현재의 명동·충무로 일대에 언덕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높은 고개가 아니었음에도 흙이 매우 질어서 통행이 불편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진고개 근처를 남산골이라고 불렀으며, 주로 하급관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상인 10여명이 일본공사관(현 예장동)이 위치한 진고개 일대에 자리 잡은 후, 1884년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1885년 진고개 일대(현 충무로1가·예장동·주자동)가 일본인 거류구역으로 지정되었고, 당시 진고개는 일본에서 들여온 근대적 상품의 전시장과 같았다. 특히 일본 요리집·과자집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1887년경 진고개 근처에서 정문루(井門樓, 최초의 일본식 요정)가 개업하였는데, 술·요리·게이샤를 함께 파는 요정은 조선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이후 가게이름 뒤에 <정·루>를 붙힌 고급요릿집들이 속속 개업하였는데, 대표적으로 화월루·청화정·개건정·송본루·남산정 등이 있었다. 1904년 귀국한 송병준은 청화정(淸華亭)을 운영했는데, 밤마다 일본관료·친일파와 회동하여 스스로의 안위와 함께 매국을 논의하면서 술과 여자를 즐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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