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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버블 초입에 시작된, 도심 재개발

by Spacewizard 2025.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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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사람이 한성에 거주하기 시작하기 시작한 시점은 1882년(고종 19)으로, 청나라와 조선 간에 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다. 이전 글 <국적이 변화한, 화교>에서 임오군란 전후 제물포로 상륙한 청군 3천명을 따라 입국한 40여명의 산동성 주민(상인·요리사)이 최초의 화교라고 언급했었다. 이후 1950년대 소공동은 화교세력의 중심지였다. 1966년 존슨(미국 36대 대통령)이 마닐라(필리핀)에서 개최된 베트남 참전 7개국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10월 31일 한국을 방문했다. 베트남전에 대한 반미정서가 세계적으로 팽배한 가운데, 존슨의 방한을 환경하기 위해 200만명 이상의 서울시민이 동원되었다.

 

문제는 방송국 카메라였다. 한미의 TV방송국이 서울시청 앞 광장의 환영인파를 실황중계를 하는 도중에, 주변의 슬럼지대가 방송에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당시 멀리 보이는 한국은행(3~4층 규모)을 제외하고는, 따닥따닥 붙어 있는 판자촌이 서울의 실상이었다. 이후 소공지구 재개발이 추진되는데, 미주교민회에서는 시청 주변의 슬럼지대를 정화해달라는 탄원서까지 보냈다. 참고로 1979년 6월 방한한 카터를 환영하기 위한 시민환영대회가 여의도광장에서 열렸는데, 서울시는 카터의 동선(여의도-마포로-서소문-시청)을 따라 대대적인 정비사업(2억원대)를 시행했다.

 

화교의 공간이었던, 플라자호텔 부지

 

하지만 시민아파트의 붕괴사고로 김현옥이 물러나면서, 후임 양택식(1970년 부임)이 소공지구 재개발을 주도했다. 양택식은 시청 앞 광장에 밀집된 중국인 상가를 철거하고, 대규모 빌딩을 세우는 계획을 수립했다. 거주 중인 원주민(중국인)에게는 빌딩 내의 공간을 소유지분율에 따라 배분하는 입체환지 방식이었다. 하지만 철거가 완료된 후에도, 서울시는 1972년까지 사업진행을 하지 않았다.

 

이에 버티다 못한 화교들은 한국화약(훗날 한화)이 제시한 평당 107만원에 소유권을 넘기게 된다. 1973년 한국화약은 마루베니(일본 종합상사)와 호텔사업을 위한 합작을 하게 되고, 1976년 플라자호텔을 건립한다. 이후 도심 슬럼지대에 오피스를 짓는 도심부 재개발이 활성화되는데, 가장 적극적인 기관이 보험사였다. 1976년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은 남대문 가는 길목에 삼성본관을 건립되었고, 1981년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보험)은 광화문 사거리에 교보빌딩이 세웠다. 1980년대는 한국경제의 최전성기로, 1981년 이후 10년 동안 다음 3저 효과로 인해 1인당 국민소득이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유가

금리

환율 : 원저엔고

 

1986년 46억 달러 가량의 경상수지 흑자를 최초로 기록하였고,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연평균 12%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당시 저환율의 배경에는 플라자합의가 있었는데, 1970년대 일본의 급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의도적으로 엔화강세와 달러약세를 만든 것이다. 이전 글 <금리인하 경쟁의 단초, 관세>에서는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이 펼친 저금리 정책이 거품경제를 만들었고, 결국 금리인상으로 30년 동안 일본경제의 발목을 잡았다고 언급했다. 이 때 일본기업은 엔화강세로 인해 수출경쟁력이 하락했고, 이에 대한 반사이익으로 가격경쟁력을 확보한 한국제품들이 세계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다.

 

1989년 이후 국제경제 환경의 변화로 3저 효과는 약화되었는데, 3저 효과로 증가된 무역흑자·외환보유고가 자산투기(불로소득)와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에 이용되면서 국가경제가 구조적으로 약화되었다. 특히 재벌의 무분별한 계열사 확장은 볼륨 확대를 위한 비생산적 투자와 그룹 내 내부거래 증가를 가져왔고, 결국 3저 효과가 끝난 지 10여년이 지난 후에 IMF 외환위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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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이 끼기 전에 부동산에 투자한, 기관

 

1980년대 후반 자산버블도 상당했는데, 1989년 종합주가지수는 1000대를 넘어서면서 1987년 500대와 비교하여 2배 가까이 증가했었다. 부동산 버블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1988~1990년 전국 집값이 연평균 +16.3% 상승했고, 특히 아파트 가격은 1985년 이후 2~4배 폭등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산투자는 개인보다 기관이 한 발 빨랐는데, 1980년대 초반부터 서울 도심부(남산·태평로·세종로·을지로·종로·일대)에는 다음과 같이 재개발이 시행되었다.

 

공평동 태화빌딩(1982년)

남산 힐튼호텔(1983년)

공평동 하나로빌딩(1984년)

태평로 삼성생명플라자(현 부영사옥, 1984년)

태평로 프레스센터(1985년)

순화동 중앙일보사(호암아트홀, 1985년)

을지로 삼성화재(현 더존을지타워, 1987년)

을지로 두산빌딩(현 하나은행 본점, 1987년)

종로 제일은행(1987년)

을지로2가 현암빌딩(현 한화빌딩, 1987년)

을지로2가 장교빌딩(1987년)

을지로2가 중소기업은행(현 기업은행, 1987년)

양동지구 제일제당빌딩(1994년)

양동지구 남산그린빌딩(1994년)

 

이전 글 <호화로운 풍류에서 시작된, 순화궁 터>에서는 구사맹의 저택(인조의 잠저)이였던 서측(부용당)은 태화빌딩이 되었고, 구사안이 거주하던 동측(태화정)은 하나로빌딩이 되었다고 언급했었다. 1987년 삼성화재는 을지로 입구에 본사건물을 준공했다. 40여년 전 도심에 대형건물을 세운 대형자본(대기업)들은 부동산버블을 타고 큰 자본차익을 얻었으며, 지난 40년 동안 개인들도 대형자본 못지 않게 아파트 투자로 큰 자본차익을 얻었다.

 

참고로 라칸티나가 입주한 삼성빌딩은 1966년 준공건물로, 삼성화재의 소유이다. 1967년 삼성빌딩 지하 1층에 오픈한 라칸티나(La Cantina, 지하 와인 저장창고)국내 최초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평가받으며, 오랫 동안 많은 삼성그룹 인사(이병철 포함)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병철이 즐겨 먹었던 삼성세트라는 메뉴가 있는데, 메뉴판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입구부터 내부까지 유럽풍 인테리어로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다.

덕수궁 대한문에서 바라 본, 삼성화재 본사와 삼성빌딩 [출처:카카오맵]

10년을 못 넘긴 프랑스 쇼핑, 쁘렝땅

 

1998년 학교과제로 도심 답사를 다니던 도중, 장교빌딩 지하의 대형 마트에서 요거트를 사 먹은 기억이 있다. 마트명이 쁘렝땅이었는지 여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울에 사는 동기들이 쁘렝땅백화점 식품코너가 있던 자리라고 했던 기억은 난다. 당시 쁘렝땅이라는 이름이 매우 낯설었다.

 

1988년 장교빌딩(집한건축물)에 쁘렝땅백화점이 입점했는데, 동아백화점(화성산업 계열)이 소유 중이었던 전유부에서 영업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기업 쁘렝땅(Le Printemps)은 동아백화점과 프랜차이즈 형태의 계약을 체결하면서 국내에 진출했지만, 서울에 진출한지 9년 만인 1997년, 쁘렝땅백화점은 사업부진으로 철수했다.

 

쁘렝땅백화점은 화려한 외관을 지닌 돔 형식의 건축물로, 백화점 최초로 파리 역사기념물에 등재되었다. 1865년 쁘렝땅백화점은 프랑스 파리 오스만 거리(Blvd Haussmann)에 설립되었는데, 특히 개점 초기에는 검은 실크(Marie-Blanche)를 독점적으로 판매하면서 유명해졌다. 쁘렝땅백화점은 프랑스 백화점업계에서 혁신의 아이콘으로 인식되었다. 1866년 시즌세일을 프랑스 최초로 도입했으며, 1874년에는 엘리베이터를 프랑스 백화점 최초로 설치했다. 1881년 대형화재로 매장이 전소했지만, 재건축 과정에서 철제외관과 전기조명을 적용면서 유럽의 백화점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2022년 전면 리뉴얼을 실시한 쁘렝땅백화점은 여전히 현지인과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쇼핑공간이다. 한국인의 편의를 위해 카카오페이 결제시스템을 프랑스 백화점 최초로 도입했으며, 2025년 여성관에서 열린 신세계 하이퍼그라운드의 팝업스토어에서는 K-뷰티 브랜드가 선보였다.

 

조르주 외젠 오스만(Georges-Eugène Haussmann) 남작은 1853년부터 17년 동안 주지사(센 주)로 재직하면서, 나폴레옹 3세의 지시에 따라 대대적인 파리 도시개조사업을 주도했다. 센 주는 프랑스 중심을 포함하는 행정구역으로, 센강(la Seine, 라세느)에서 유래했다. 롯데호텔이 뷔페 레스토랑 이름이 라세느인데, 프랑스의 도시문화와 유럽풍 이미지를 통해 고급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를 강조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오스만 남작은 김현옥 서울시장과 비슷한 입지의 인물이 아닐까 한다. 넓은 직선도로(오스만식 대로), 대로변의 균일한 파사드, 상·하수도, 공원, 아파트가 도입되면서, 현대적인 파리의 도시구조와 미관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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