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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작을 통한 신분상승, 송사련

by Spacewizard 2025.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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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부터 방영된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송익필(박지일 분)이 서인의 모사꾼으로 등장하는데,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의 난) 이후 동인에 대한 복수를 주도한 인물로 평가된다. 모사(謀士)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제후를 위해 정책·전략을 제시했던 지식인을 의미했지만, 오늘날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인다. 모사꾼은 교묘한 꾀로 일을 꾸미거나, 이간질하는 사람을 의미하다.

 

신분역전을 노렸던, 고변사건

 

1519년(중종 14) 중종의 주도로 남곤·심정이 일으킨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수많은 사림들을 숙청되었는데, 당시 안당은 조광조를 두둔하다가 좌의정에서 파직당했다. 안당의 아들(안처겸·안처근)은 아버지의 일에 불만을 품고, 남곤·심정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521년 10월 11일 진시(辰時, 오전 7~9시) >송사련은 정상(송사련 처남)과 함께 승정원을 찾아서 다음과 같이 고변했다.


안처겸이 지난날 언제나 저에게 말하기를

'간신이 오랫동안 조정에 있게 해서는 안 되니 마땅히 먼저 제거한 다음 주상께 아뢰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고변은 신사무옥(辛巳誣獄)의 발단이 되었는데, 안처겸의 대화를 엿들은 송사련이 안처겸을 역모로 고발한 것이다. 안당 부인의 장례식에 찾은 문상객과 일꾼들을 거사의 세력으로 몰았던 것이다.

 

안당은 송사련의 혈연적 외삼촌이었으며, 안처겸은 외사촌이었다. 안돈후(안당 부)가 비첩(婢妾, 첩이 된 계집종) 사이에서 감정(송사련 모)을 낳았다. 당시 모계의 신분을 따르도록 했기에, 1496년에 태어난 송사련은 서녀의 아들이자 종의 외손자였다. 송사련은 안당의 도움으로 천한 신분을 면하고 관직에 올라 관상감판관(잡직)에 올랐으나, 결국 외삼촌 가문을 멸문지화시켰다. 관상감판관은 관상감 소속의 판관(判官, 종5품)으로, 천문·기상·역서(달력) 제작 등의 업무를 맡았던 실무관리이다. 이전 글 <막내를 왕위에 올린 막내, 이하응>에서 북부 광화방(현 현대건설 계동사옥)에 서운관(훗날 관상감) 별감을 설치하고, 그 별감 앞 고개를 운현이라 했다고 언급했다.

 

핏줄에 발목잡힌, 송익필

 

송사련은 고변을 통해 정3품에 오르면서 안당의 저택까지 차지했다. 신분제 차별로 쌓인 한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데, 인구의 절반 가량이 노비였던 조선의 망국 시점에 슬퍼하는 이가 없을 만 하다. 송사련 고변사건으로부터 13년이 지난 1534년(중종 29), 송익필이 태어났다. 송익필은 부친 덕분에 평온한 삶을 영위했을 것이다. 1559년(명종 14) 26세의 송익필은 대과를 준비 중이었는데, 조정 내에서는 출신(비첩 후손)을 문제 삼아 송익필의 과거응시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다.

 

이에 송익필은 벼슬길을 접고 파주 구봉산(훗날 심학산) 자락에 거처를 마련한 뒤, 학문을 닦았다. 송익필의 호는 산이름을 따서 구봉(龜峯)이라 했다. 이전 글 <오래 전 글로 피어난, 파주>에서 조선 후기에 이름이 바뀐 심학산은 원래 수막산(한강물 범람을 막는 산)으로 불렸다고 언급했었는데, 영조 이전에는 거북이등을 닮았다고 하여 구봉산으로도 불렸었다. 1560년 가을 송익필이 맞이한 첫 제자가 13세의 김장생(김계휘 아들)이었는데, 김계휘(대사헌 출신)가 아들을 맡길 정도로 학문적인 명망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서인의 비선실세, 노비

 

송익필·김장생의 만남은 서인학맥의 사실상 시작이었고, 김장생은 이이의 제자이기도 했다. 이전 글 <탈인간적이면서 인간적인, 이이>에서 파주에 사는 동갑내기 4명(송익필·성혼·심의겸·이이)이 일찍부터 무리지어 조정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 서인의 출발점이었다고 언급했었다. 훗날 이이의 제자라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김집

송시열

송준길

 

송익필은 직접 벼슬을 할 수 없었기에, 이이·정철을 내세우면서 현실정치에 관여했다. 선조대 초반 선조·동인은 심의겸을 견제하면서 거리를 두었다. 1584년(선조 17) 이이가 죽자, 송익필은 제율곡문(祭栗谷文)을 썼다. 제문(祭文)은 고인을 추도·추모하는 내용을 담아 작성하는 의례문으로, 축문보다 길고 내용이 풍부하다. 송익필을 커버해 주던 이이가 사라졌으니, 송익필은 언제 제거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처지가 되었다.

 

이이가 죽은지 2년이 지난 1586년 5월, 조정을 장악한 이발(동인 수장)은 서인의 막빈으로 송익필을 지목하였다. 막빈(幕賓, 비서·비장)은 >장군·지방관 수하에서 참모·고문 노릇을 하는 사람으로, 부하가 아닌 손님대접을 받는 사람을 말한다. 쉽게 말해 공식적인 직함 없이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비선실세이다. 근래에는 최순실이 박근혜의 비선실세였지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막빈으로는 송익필(서인), 장녹수(연산군), 김개시(광해군), 진령군(명성왕후)가 있었다.

 

추노꾼에 쫓긴, 송사련 후손

 

안씨가문에서 제기한 송사를 통해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졌고, 장례원(掌隷院, 노비문제 관할)은 송익필 일가를 다시 안씨가문의 노비로 판정했다. 이에 송익필 일가 70여명은 도피생활에 들어갔고, 안씨가문은 추노꾼을 고용하여 흩어진 송익필 일가를 찾아 나섰다. 1575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송사련은 아들이 출신의 문제로 출세하지 못한 것을 목도했지만, 생전에 다시 노비로 전락하지 않았으니 팔자가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추노(推奴, 노비를 조사함)는 도망노비를 추(追, 쫒을)하는 것이 아닌, 주인에게 추(推, 밀다·조사)하는 것이다. 추쇄(推刷, 조사하여 찾다)는 부역·병역을 기피하고 도망친 노비를 잡아, 원래의 주인이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정조가 즉위하기 전까지는, 노비의 추쇄를 쇄관(刷官, 노비를 잡아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벼슬아치)에게 맡겼었다. 추노는 사실상 채권추심과 유사했는데, 잡은 도망노비를 주인집에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밀린 신공(身貢)을 징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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