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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시

[역사] 한때 한반도 외교를 이끈, 위구르

by Spacewizard 202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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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계 귀화성씨는 다음과 같으며, 이들의 시조는 세렝가강 근처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

 

덕수장씨

경주설씨(구 고창설씨)

임천이씨

상곡마씨

 

장순룡(덕수장씨 시조)은 원나라 제국공주(齊國公主, 충렬왕 정비)의 시종으로 고려에 들어와 귀화한 인물로, 제국공주(원세조 쿠빌라이 딸)은 고려왕실과 최초로 혼인한 몽골왕족이었다. 고려관직을 지낸 장순룡은 덕수리(황해도 개풍군)를 식읍으로 받아, 그 후손들이 덕수(德水)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 말 이현(임천이씨 시조)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로 망명하여, 공양왕대 남경(명나라)을 다녀온 공으로 임천을 식읍으로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망명한 설손(경주설씨 시조)은 공민왕과의 직접적인 인연으로 환대를 받았는데, 원래는 원나라 고창설씨의 후손이다. 원나라에서는 위구르를 고창(高昌)이라고 불렀고, 설씨는 설연하(세렝가강)의 앞글자에서 유래했다.

테무진 가계도

칭기즈 칸에게 협조한 공로가 있는 고창설씨 가문은 원나라 중앙관직에서도 활약이 컸다고 한다. 고창설씨의 가풍은 자녀교육에서 찾을 수 있는데, 무신이었던 위에린테무르(고창설씨 시조)는 자식들에게 학문(논어·맹자·사서 등)을 공부시켰다. 이후 과거합격자가 연이어 배출되면서 위구르 출신 원나라 명문가문으로 거듭나게 된다. 설손은 단본당(端本堂, 황실교육기관)에서 황태자의 경전교육을 담당했었는데, 원나라 왕실에 숙위로 와 있던 빠이앤티무르(고려 충숙왕 차남, 훗날 공민왕)와 가깝게 지내면서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원나라는 고려왕자를 원나라에 일정기간 억류시키면서, 정비로 맞은 원나라 공주가 출산한 아들만 고려왕위에 오를 수 있게 했다. 숙위(宿衛, 궁궐에서 군주를 호위하며 지키는 제도·사람)는 중국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주변국의 왕자를 의미한다. 순제대 들어 원나라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했고, 1359년(고려 공민왕 8) 설손은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5명의 아들을 포함한 식솔들을 거느리고 원나라를 떠나 고려로 넘어왔다. 반원정책을 추진 중이던 공민왕은 설손에게 극진한 예우를 하며, 고창백(高昌伯)이라는 칭호와 함께 전답·집을 제공했다.

 

여말선초 최고의 외교관, 설장수

 

고려로 이주한 이듬해인 1360년 설손은 숨을 거둔다. 공민왕은 설장수(설손 장남)를 특히 아꼈는데, 부친의 상중이었음에도 설장수가 과거시험을 칠 수 있도록 배려했다. 1362년 치러진 과거시험에서 20세의 설장수를 포함한 총 33명이 합격했는데, 동기 중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관직에 오른 설장수가 외교통으로 자리잡게 된 계기는 설사(설장수 삼촌)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1367년 설사는 명나라에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하였고, 이후 2차례(1369년·1370년)에 걸쳐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 주원장은 반원정책을 취해왔던 공민왕을 고려왕으로 봉하기로 했는데, 설사가 임명장·옥새를 가지고 와서 책봉조치를 시행했던 것이다. 공민왕 입장에서는 화답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 설사의 조카인 설장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실력·인맥을 두루 갖춘 설장수는 원·명 교체기에 대체불가한 대중외교관이 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피살된 후, 친원정책을 추진하던 이인임이 정권을 장악했다. 우왕을 추대한 이인임 정권은 친원정책을 펼치면,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동시에 원나라와의 외교관계를 18년 만에 재개했다. 하지만 이색 계열의 개혁소장파(정도전·정몽주·하륜·이숭인·김구용·권근·박의중·박상충 등)는 친원정책을 격렬히 반대했고, 북원사신에 대한 영접거부를 고집하다가 유배를 가게 되었다. 반원파와 뜻을 같이 하던 설장수도 중앙관계에서 밀려나 지방관으로 전전하면서도, 고려왕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전 글 <머리와 처세로 출세한 얼자, 하륜>에서는 1388년 우왕의 명을 받은 최영·이성계가 이인임 일파를 숙청한 무진피화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1389년 이성계 일파는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는데, 공양왕 옹립에 공을 세웠던 9명의 관료들이 좌명공신(정란 9공신)으로 책봉됐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9명의 동지는 다음과 같다.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이전 글 <오지에서 시작된 문벌, 청송심씨>에서는 서울집(경파)로 불린 청송심씨 심덕부의 후손이 대대로 벼슬을 지냈다고 언급했었다. 그러나 어디서나 내분은 발생하기 마련이며, 정치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정몽주는 급진개혁파(이성계·정도전)를 정계에서 축출했고, 왕세자를 조현 명분으로 명나라로 보내면서 설장수를 특사로 함께 보낸다. 조현(朝見)은 신하가 임금을 찾아 뵙거나 임금이 상왕·태후 등을 찾아 뵙는 것을 말하는데, 정몽주의 의도는 고려왕권(공양왕·왕세자)의 입지를 견고히 하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급진개혁파가 기획 중인 개국노선과 선을 분명히 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몽주·설장수는 급진개혁파의 눈 밖에 나게 된다. 결국 정몽주는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1392년 7월 30일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왕조를 세우고 태조 즉위교서 반포한 직후, 설장수를 조선시대 최초로 경상도 장기현 유배에 처해졌다. 이전 글 <불모지에서도 계속 피어난, 기독교>에서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배교의지를 인정받은 정약용이 장기현에 유배되었다고 언급했었다. 설장수의 혐의는 이색·정몽주·우현보 등과 함께 도당(徒黨, 불순한 무리)을 지어 내란을 음모했다는 것이다. 중국 주나라에서는 호적편제 단위로 당(黨)을 사용했는데, 훗날  <무리·단체>의 의미로 쓰이게 된다. 참고로 주나라 1당은 500가구가 사는 땅을 일컫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대명관계를 안정시킬 만한 유능한 외교관이 필요했었는데, 그래서인지 1393년(태조 2) 1월 설장수는 6개월 만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이성계는 사역원을 설치하여 그 수장(제조)로 설장수를 임명했다. 사역원(司譯院)은 외국어 교육과 통·번역 사무와 실무를 맡던 기관으로, 역관 선발시험을 개편하고 역관들의 유교적 지식과 학문적·인성적 기초를 갖출 수 있도록 사서·소학을 이수토록 하였다.

 

1396년(태조 5) 이성계는 설장수에게 계림(鷄林, 현 경주)을 관향으로 삼도록 사성하면서, 설장수는 경주설씨의 시조가 되었다. 고려시대의 고창설씨가 조선시대의 경수설씨가 된 것이다. 1398년(태조 7)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피살되고, 정종이 즉위했다. 다음달 9월 설장수는 세자책봉사절로 명나라로 가든 도중 주원장의 부고소식을 전해 듣은 후, 진향사(進香使, 중국황실의 국상에 조의를 표하는 사행단)로 임무를 변경하여 마지막 외교업무를 수행했다. 1399년 6월 명나라에서 귀국한 설장수는 건강악화로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위구르 출신 이방인이 한때나마 한반도의 외교사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출입국·이민관리청(이민청) 신설을 위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2024년 2월 국회에 상정되었는데, 21대 국회회기가 5월에 종료되면서 폐기된 바 있다. 이민청 설립이슈는 중장기적으로 외국인노동자들을 국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인구문제를 해결할 대안 중 하나일 수 있다. 따라서 22대 국회에서도 치열한 논의가 예상되는 바, 고려말 우리민족의 개방성·포용성이 오늘날 한국의 이민정책에도 반영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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